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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승현의 시선

살인자에 대한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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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사회부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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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범인만 등장했다. 연쇄살인범 유영철(2004년)과 정남규(2006년)가 그랬다. 강호순도 마찬가지다.’

2009년 1월 31일 자 중앙일보 4면 기사의 도입부다. 신문엔 나흘 전 검거된 연쇄살인마 강호순(당시 40세·사형 확정판결)의 얼굴이 공개됐다. 8명의 여성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죽인 살인자였다. 훤칠한 외모, 친절한 말투, 멋진 반려견…. 사이코패스는 귀갓길 여성을 차로 유인해 성욕을 해소하고 죽인 뒤 암매장했다. 2년(2006년 12월~2008년 12월) 사이 그 많은 여성이 속절없이 당했다.

강호순 계기로 신상공개법 도입
‘부산 돌려차기’ 피해자에겐 미흡
살아남은 그녀 말에 귀 기울여야

그날의 기사는 끔찍한 사건 속보와 별도로 ‘얼굴 없는 흉악범’ 문제를 공론화하는 내용이었다. ‘인륜을 저버린 흉악범의 인권보다는 사회적 안전망이 우선’이라는 언론사의 판단을 알렸다. 기사 작성자는 필자였지만, 신문의 사설처럼 여러 기자의 비장한 총의가 모인 것이었다. 무참히 숨진 피해자, 유족의 애끊는 통곡, 점점 뻔뻔해지는 살인마의 가려진 얼굴, 그리고 그의 인권…. 익명 보도에 회의감을 느낀 기자들은 참을 수 없는 그 가벼움을 자책하고 있었다.

당시의 법은 범행을 의심받는 단계에 있는 피의자의 신상 공개를 허락하지 않았다. 검사나 경찰관은 언론의 플래시 앞에서 흉악범을 가리기 바빴다. 공직자의 의협심으로는 법령을 이길 수 없었다. 민간 부문인 언론의 얼굴 공개 역시 ‘무죄 추정’과 ‘피의자 인권 보호’ 등의 원칙에 대한 도전이자 일탈이었다.

편집국엔 흉악범의 가려진 신상에 유독 분노하는 몇몇이 있었다. 그 분노가 회의와 술자리에서 자연스레 공론화됐다. 40대 중반의 사회부 데스크는 “딸 잃은 부모 앞에서 할 짓이 아니다”라고 폭발했고, 30대 후반 팀장은 “나 같으면 저거 가만 안 둔다”며 맞장구를 쳤다. 후배인 필자 역시 분기탱천했다. 얼근해진 기자들의 공감대가 얼굴 공개 보도의 출발점이었다.

세 명의 기자에게 공통점이 있다는 걸 뒤늦게 확인했던 기억도 있다. 40대 데스크의 셋째, 30대 팀장의 둘째, 그리고 필자의 첫째 딸이 6살 동갑내기였다. 딸이 자라날 도시에 강호순 같은 살인마가 돌아다니고 붙잡힌 뒤에는 수사기관의 보호를 받는 현실에 상대적으로 더 강한 분노를 느꼈던 것 같다. 그날의 ‘도원결의’는 딸바보 3인방의 양심선언이었던 셈이다.

강호순 얼굴 공개를 위해 자문한 언론법 전문가, 전·현직 법조인, 시민단체 인사들은 찬반이 엇갈렸다. “증거가 명백한 반인륜 범죄자라면 공개하는 게 공익에 맞다”는 옹호론, “가해자에게도 인권이 있으며 일시적 분풀이로 얼굴을 공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반대론이 있었다. 양쪽 다 일리가 있었고 지금도 논쟁은 진행 중이다. 여론은 우리의 선택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사회적 응징에 따른 범죄 예방 효과, 공분 해소, 추가 범죄 제보, 국민의 알 권리 등 순기능이 크다고 느낀 것이다. 이후 모든 언론에 강호순의 얼굴이 등장했고, 이듬해인 2010년 4월 피의자의 얼굴 공개에 대한 근거 법률(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8조 2항)이 마련됐다.

연쇄살인마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한 2009년 1월 31일자 중앙일보 기사.

연쇄살인마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한 2009년 1월 31일자 중앙일보 기사.

14년 전의 추억이 결코 무용담이 될 수 없음을 지금 다시 깨닫고 있다. 이제 20대가 된 세 딸과 비슷한 연배인 한 여성이 유튜브와 법정에서 가해자의 신상 공개를 호소하고 있다. 이른바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자다. 지난해 5월 부산광역시 서면의 한 오피스텔 공동현관에서 31세 남성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하는 영상은 끔찍했다. 정부와 여당이 중대 범죄자의 신상 공개 요건을 더 확대하는 입법을 추진하는 기폭제가 됐다. 가해자에겐 1심에서 살인미수죄로 징역 12년이 선고됐고, 세간의 관심을 끈 뒤인 지난 12일의 항소심에서는 강간살인미수죄로 징역 20년이 선고됐다. 검찰 구형량은 징역 35년이었다. 피해 여성은 “출소 후에 보복하겠다고 하니 내 목숨이 8년 연장됐다고만 생각한다”며 아직도 두려움과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가해자는 대법원에 상고했다.

피해 여성이 신상 공개를 호소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 안전해졌으면 좋겠어서”이다. 가해자가 아직 익명인 이유는 수사 단계를 지난 기소 이후에는 사법 당국이 신상공개를 결정할 명확한 근거 법령이 없기 때문이다. 한 유튜버는 “불법 논란과 가해자의 보복을 감수하고라도 피해 여성과 함께하겠다”며 ‘사적’으로 가해자의 얼굴과 실명을 공개했다. 이젠 국가가 나설 차례다.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은 그녀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14년 전 무참히 스러진 여성들이 하지 못했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