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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자영업자 소설은 없더라…그래서 쓴다, 이게 현실이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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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정진영(왼쪽)과 이서수는 ‘월급사실주의’ 작가 모임 소속이다. 자영업자, 플랫폼 노동자 등에 관한 소설집을 오는 8월 낸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정진영(왼쪽)과 이서수는 ‘월급사실주의’ 작가 모임 소속이다. 자영업자, 플랫폼 노동자 등에 관한 소설집을 오는 8월 낸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한국은 자영업자 비율이 높은 나라잖아요. 이렇게 망하는 가게가 많은데, 왜 자영업자 망하는 얘기는 소설로 안 나오지?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이념적인 색채가 없다는 점에서 ‘노동 소설’이라기보다 ‘일상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소설가 이서수·정진영)

‘월급사실주의’라는 이름의 소설가 모임이 있다. ‘월급’은 예술가와 동떨어진 단어고, ‘사실주의’는 철 지난 문예사조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둘을 조합한 특이한 지점이 윗세대 문인과 이들을 구분하는 경계다. “문학은 종교가 아니며 특별한 예술도 아니다”라고 믿는 월급사실주의 동인 작가는 11명이다. 그중 최근 새 소설집 『젊은 근희의 행진』을 낸 이서수(40) 작가, 장편소설 『정치인』을 낸 정진영(42) 작가를 16일 함께 만났다.

이서수의 소설은 현실적이다. 성인 웹툰 어시스턴트로 일하다 스트레스성 원형탈모가 생긴 수영, 5000만원을 손에 쥐고 낙성대역 인근 반지하 전세방을 구하려는 미조, 가슴골을 드러내는 옷을 입고 책 소개 유튜브를 진행하는 근희가 소설집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주거와 고용, 어느 하나도 번듯한 게 없는 이들을 작가는 참새에 비유한다. 1950년대 중국에서 곡식을 축내는 참새를 없애려고 둥지를 망가뜨려 어디에도 앉아 쉬지 못하게 했다. 이 작가는 자신이 그리는 청춘이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하고 날개를 퍼덕이는 참새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정진영의 『정치인』은 ‘조직 3부작’의 마지막 편이다. 정 작가는 앞서 언론사 배경의 『침묵주의보』와 대기업 계열사에서 벌어지는 부조리를 다룬 『젠가』를 출간했다. 『정치인』은 비례대표 후순위였던 한 시민단체 대표가 엉겁결에 임기 1년이 남은 국회의원이 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다. 국회 내 권력 구조와 입법 과정이 상세하게 펼쳐진다.

일간지 기자 출신인 정 작가는 “수많은 보좌관, 전직 국회의원, 정치부 기자를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국회 상임위원회 회의록을 뒤졌다”며 “현실에 발붙이지 못하는 소설은 의미가 없다”고 했다. 언론사와 기업, 국회가 배경인 소설을 쓴 이유도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 작가는 소설에서 거추장스러운 수사와 사유를 걷어내고 대신 거침없이 돌진한다. “미문을 쓰고 싶지도, 예술가 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다”는 그는 “소설의 본질은 이야기다. 힘있게 뻗어 나가는 서사 없이, 미문과 감성으로만 승부하는 단편 위주의 문학 생태계가 한국 문단을 갈라파고스로 만들었다”고 했다.

뚜렷한 기승전결 구조와 사실적인 캐릭터로 승부해선지, 정 작가는 지식재산권(IP) 시장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기도 한다. 전작 『침묵주의보』는 2020년 JTBC 드라마 ‘허쉬’로 만들어졌고, 『정치인』은 출간 전에 드라마 판권이 팔렸다. 정 작가는 “영상화를 염두에 두고 소설 작업을 하면서 톤이 가벼워졌다. 소설보다 드라마 시나리오 같은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재밌는 이야기라는 평이면 족하다”고 했다.

월급사실주의 작가들은 오는 8월 단편 모음집을 낸다. 이서수·정진영 외에 김의경·서유미·장강명 등이 참여한다. ‘한국 소설이 우리 시대의 노동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고 있다’는 게 이들의 공통 인식이다. 일자리를 찾아 상경했지만, 전셋집을 구하지 못해 애먹고, 임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 애먹는 도시 노동자, 회사가 주는 식대를 한 푼이라도 올려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직장인이 등장한다. 우리 주변 어딘가에서 근근이 버티며 살아갈 것 같은 이들이다.

이서수·정진영은 우리 시대의 노동 중에서도 특히 자영업자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이서수는 코로나19를 거치며 운영하던 북카페 문을 닫았다. 택배 일을 한 경험도 있다. 일정치 않은 직업을 전전하며 “주변 시세보다 저렴한 곳은 곧 허물어질 재개발 구역뿐이라 이사와 퇴거를 반복하며 살았던” 경험이 그의 소설에 나이테처럼 새겨졌다.

“자영업자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이 많아졌으면 한다”는 이 작가는 “자영업을 다룬 장편이 거의 없다”며 구체적인 구상을 귀띔했다. “‘카운터에 있는 키 작은 20대 단발머리 여자 직원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라고 리뷰 창을 도배하는 별점 테러족이나, 카운터라는 막다른 벽에 갇혀 취객의 난동을 감당해야 하는 자영업자의 일상을 다루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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