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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과 9900억 국제분쟁…정부 '690억+이자' 배상 판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우리 정부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에 약 5358만 달러(약 690억원)의 손해배상금을 지불해야한다는 중재 결과가 나왔다. 엘리엇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의 외압이 있었고, 이 때문에 삼성물산 주주로서 7억7000만 달러(약9917억원)의 손해를 봤다며 2018년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중재를 신청했다. 국정농단 수사로 촉발된 국제투자분쟁(ISDS)에서 정부가 사실상 판정승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상설중재재판소(PCA) 중재판정부는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약 690억원)와 지연이자의 지급을 명했다고 법무부가 20일 밝혔다. 지연이자는 2015년 7월 16일부터 판정일인 올해 6월 20일까지의 기간으로 5% 연복리를 지급토록했다.

중재판정부는 또 엘리엇이 정부에 법률비용 345만7479.87달러(약 44억5000만원)를 지급하고, 정부는 엘리엇에 법률비용 2890만3188.90달러(약 372억5000만원)를 지급하도록 명했다. 배상금과 지연이자, 법률비용을 모두 합하면 정부가 지급해야 하는 액수는 약 1300억원이다. 법무부는 “엘리엇의 청구금액 7억7000만달러(약 9917억원) 가운데 배상원금 기준으로 약 7%만 인용해 정부가 약 93% 승소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행동주의 펀드인 엘리엇은 2015년 5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을 발표하자 삼성물산 지분 7.12%를 취득한 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비율(1:0.35)이 삼성물산에 지나치게 불리하다”며 합병 반대에 나섰다. 엘리엇은 이후 주주총회 금지 가처분 소송 등을 제기했지만 법원에서 기각됐고,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에 각각 대규모 지분을 갖고 있던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며 2015년 7월 두 회사의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은 통과됐다.

엘리엇은 3년 후인 2018년 7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해 7억7000만달러(약 9925억원)의 손해를 봤다며 상설중재재판소에 중재 신청을 했다. 이른바 국정농단 특검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두 회사의 합병을 위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씨에게 뇌물을 건넸다며 2017년 2월 재판에 넘기자 엘리엇은 이를 기회로 삼은 것이다.

이후 상설중재재판소에서 엘리엇은 “정부의 불법적인 개입이 없었으면 국민연금은 합병에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우리 정부는 “정부 개입 없이도 국민연금이 합병을 찬성했을 것”이라고 맞섰다. 표면적으로는 정부가 엘리엇에 손해를 배상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내용면에서 보면 법무부가 불리했던 재판 여건을 극복한 것으로 분석된다. 엘리엇측은 국정농단 재판 결과를 근거로 정부의 논리를 비판해왔기 때문이다.

검찰, 내일 상세 결과 공개…구상권 청구여부도 관심 

정부는 결정문을 검토한 후 입장을 밝힐 방침이다. 법무부는 우선 21일 오후 결정문 분석 결과를 공개할 예정이다. 만일 정부가 중재결과에 불복한다면, 28일 안에 I상설중재재판소에 취소신청을 해야한다. 법무부는 “불복 여부는 면밀한 검토 후 결정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엘리엇에 줘야하는 5358만 달러는 국민 세금이다. 원론적으로 보면 정부가 엘리엇에 배상한 후 합병에 책임이 있는 인물들에 대해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선 ‘부정한 청탁’과 함께 뇌물을 주고받은 혐의가 인정된 상태고,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도 국민연금공단이 합병을 찬성토록 압박한 혐의로 유죄가 확정됐다. 이들 유죄 선고를 받은 대상에 대해선 구상권 청구대상으로 인정될 소지가 크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실제로 구상권을 행사하기 위해선 고의와 중과실 등 책임 소재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며 “무죄를 받은 인물에 대해서도 별도의 검토를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중재 결과는 유사 사건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미국계 헤지펀드인 메이슨도 엘리엇과 같은 이유로 2억 달러(약 2578억원)의 손해가 발생했다면서 국제투자분쟁(ISDS)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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