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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업자 이야기는 왜 없나요?"…'월급사실주의' 작가들 뭉쳐 시대의 초상 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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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자영업자 비율이 높은 나라잖아요. 이렇게 망하는 가게가 많은데, 왜 자영업자 망하는 얘기는 소설로 안 나오지?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이념적인 색채가 없다는 점에서 '노동 소설'이라기보다 '일상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이서수·정진영)

최근 장편『정치인』을 쓴 정진영 작가(왼쪽)과 소설집『젊은 근희의 행진』을 출간한 이서수 작가.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최근 장편『정치인』을 쓴 정진영 작가(왼쪽)과 소설집『젊은 근희의 행진』을 출간한 이서수 작가.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월급사실주의' 라는 이름의 소설가 모임이 있다. '월급'은 예술가와 동떨어진 단어이고, '사실주의'는 철 지난 문예사조를 떠올리게 하지만, 둘을 조합한 특이한 지점이 윗세대 문인들과 이들을 구분하는 경계선이다. "문학은 종교가 아니며 특별한 예술도 아니"라고 믿는 월급사실주의 동인 작가는 11명이나 된다. 그중 최근 새 소설집 『젊은 근희의 행진』을 낸 이서수(40) 작가와 장편소설 『정치인』을 낸 정진영(42) 작가를 16일 함께 만났다.

이서수의 소설은 현실적이다. 성인 웹툰 어시스턴트로 일하다 스트레스성 원형탈모가 생긴 '수영', 5000만원을 손에 쥐고 낙성대역 인근 반지하 전세방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미조', 가슴골을 드러내는 옷을 입고 책 소개 유튜브를 진행하는 '근희'가 소설집의 주요 인물들이다. 주거와 고용 중 어느 하나도 번듯하게 소유해 본 적이 없는 이들을 작가는 참새에 비유한다. 1950년대 중국에서 곡식을 축내는 참새를 없애기 위해 참새 둥지를 망가뜨려 어디에도 앉아 쉬지 못하게 내쫓았다고 한다. 자신이 그리는 청춘이, 발붙이지 못하고 날개를 퍼덕여야 했던 참새들을 닮았다는 것이다.

정진영의 『정치인』은 '조직 3부작'의 마지막 편이다. 정씨는 언론사가 배경인 『침묵주의보』, 대기업 계열사에서 벌어지는 부조리를 다룬 『젠가』를 출간한 바 있다. 『정치인』은 비례대표 후순위였던 한 시민 단체 대표가 엉겁결에 임기 1년 남은 국회의원이 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다. 국회 상임위원회의 권력 구조와 입법 과정이 상세하게 펼쳐진다.

최근 장편『정치인』을 쓴 정진영 작가(왼쪽)과 소설집 『젊은 근희의 행진』을 출간한 이서수 작가가 책을 바꿔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최근 장편『정치인』을 쓴 정진영 작가(왼쪽)과 소설집 『젊은 근희의 행진』을 출간한 이서수 작가가 책을 바꿔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일간지 기자 출신인 정씨는 "수많은 보좌관, 전직 국회의원, 정치부 기자를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국회 상임위 회의록을 뒤졌다"며 "현실에 발붙이지 못하는 소설은 의미가 없다"고 했다. 언론사와 기업, 국회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쓴 이유도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씨 소설은 거추장스러운 수사와 사유를 걷어내고, 거침없이 돌진한다. "미문을 쓰고 싶지도, 예술가 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다"는 그는 "소설의 본질은 이야기다. 힘 있게 뻗어 나가는 서사 없이 미문과 감성으로만 승부하는 단편 위주의 문학 생태계가 한국 문단을 갈라파고스로 만들었다"고 했다.

정진영 작가의 장편 『침묵주의보』는 JTBC 드라마 '허쉬'로 만들어졌다. 사진 JTBC

정진영 작가의 장편 『침묵주의보』는 JTBC 드라마 '허쉬'로 만들어졌다. 사진 JTBC

뚜렷한 기승전결의 구조와 사실적인 캐릭터로 승부하기 때문인지, 정씨는 지식재산권(IP) 시장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는 작가이기도 하다. 『침묵주의보』는 2020년 JTBC 드라마 '허쉬'로 만들어졌고 『정치인』은 출간 전 드라마 판권 계약을 마쳤다. 정씨는 "영상화를 염두에 두고 소설 작업을 하면서 톤이 가벼워졌다. 소설보다 드라마 시나리오 같다는 느낌을 받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재밌는 이야기'라는 평이면 족하다"고 했다.

월급사실주의 작가들은 8월 단편 모음집을 낸다. 이서수와 정진영 외에 김의경·서유미·장강명 등이 참여한다. '한국 소설이 우리 시대의 노동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지방에서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상경했지만 전셋집을 구하지 못해 애를 먹고, 이사할 때는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 애를 먹는 도시 노동자, 회사에서 제공하는 7000원짜리 식대를 한 푼이라도 올려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직장인이 등장한다. 모두 우리 주변 어딘가에서 근근이 버티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 같은 이들이다.

이서수 소설집 『젊은 근희의 행진』, 정진영 장편 『정치인』 표지. 사진 교보문고

이서수 소설집 『젊은 근희의 행진』, 정진영 장편 『정치인』 표지. 사진 교보문고

이서수와 정진영은 이 시대의 노동, 그중에서도 자영업자의 이야기에 관심이 크다고 했다. 특히 이서수는 한때 운영하던 북카페를 코로나를 거치며 문 닫았다. 택배 일을 한 경험도 있다. 일정치 않게 직업을 전전하며 "주변 시세보다 저렴한 곳은 곧 허물어질 재개발 구역뿐이라 이사와 퇴거를 전전하며 살았던" 경험은 그의 소설에 나이테처럼 새겨졌다. 자영업자를 다룬 소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자영업자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이 많아졌으면 해요. 자영업을 다룬 장편이 거의 없거든요. '카운터에 있는 키 작은 20대 단발머리 여자 직원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며 리뷰 창을 도배하는 '별점테러족'이나, 카운터라는 막다른 벽에 갇혀 취객의 난동을 감당해야 하는 자영업자의 일상을 다루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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