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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룡 반한 춘향 얼굴 맞나요"…한국판 '흑인 인어공주' 논란 [이슈추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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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김현철 화백이 그린 새 춘향 영정. 지난달 25일 전북 남원시 광한루원 춘향사당에 봉안됐다. [사진 김현철 화백]

김현철 화백이 그린 새 춘향 영정. 지난달 25일 전북 남원시 광한루원 춘향사당에 봉안됐다. [사진 김현철 화백]

"사람·시대마다 '아름다움 기준' 달라' 

최근 전북 남원시가 제작한 춘향 영정을 놓고 '못생긴 춘향'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이 영정을 그린 김현철(64) 화백은 "시대가 바뀌면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진다"고 말했다. 김 화백은 19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모델같이 '예쁜 춘향'보다 인격체로서 '당당하고 주체적인 춘향'을 그리고 싶었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앞서 남원시·남원문화원은 지난달 25일 개막한 '제93회 춘향제'에서 새 춘향 영정을 광한루원 춘향사당에 봉안했다. 새 영정은 남원문화원이 만들었고 제작비 1억7000만원은 남원시가 부담했다. 김 화백이 그린 춘향 영정은 가로 94㎝, 세로 173㎝ 크기다. 이번 영정은 작가의 친일 논란이 불거지면서 62년 만에 새로 제작됐다.

1931년 1회 춘향제 때 그려진 최초 춘향 영정(왼쪽). 강수주 화백 그림이라는 설이 있지만, 낙관이 없어 확실하지 않다. 오른쪽은 김은호 화백이 1961년 다시 그린 영정. [사진 김현철 화백]

1931년 1회 춘향제 때 그려진 최초 춘향 영정(왼쪽). 강수주 화백 그림이라는 설이 있지만, 낙관이 없어 확실하지 않다. 오른쪽은 김은호 화백이 1961년 다시 그린 영정. [사진 김현철 화백]

시민단체 "10대라고 보기 힘들어"…남원시 "교체 계획 없다"

이후 '못생긴 춘향' 논란이 일었다. 남원 지역 15개 단체가 모인 남원시민사회연석회의는 지난 14일 성명을 통해 "새 그림 속 춘향은 도저히 10대라고 보기 힘든 나이 든 여성"이라며 "춘향의 덕성이나 기품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게 중론"이라고 반발했다. 이 단체가 지난달 25~27일 시민·관광객을 대상으로 '최초 춘향 영정과 새 영정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 최초 춘향 영정은 1313표, 새 영정은 113표를 얻었다.

강경식 최초춘향영정복위시민연대 대표는 "새 영정은 남원 춘향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 '억지 춘향'"이라며 "(1931년 1회 춘향제 때 봉안된) 최초 영정을 복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남원시는 "교체 계획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에 김 화백은 "춘향은 18세기 조선시대부터 시대마다 각색을 달리하며 지금까지 널리 사랑받고 있다"고 했다. 이어 "작가 미상의 1대 초상과 김은호 화백이 그린 2대 초상은 그 시대 산물"이라며 "내가 그린 3대 초상은 이 시대 미감과 여성상이 들어간 그림으로 (1·2대 초상과 함께) 공존하는 게 옳다. 시간이 흐르면 4대 초상이 나올 수 있다"고 했다.

3대 춘향 영정을 그린 김현철 화백. 서울대 미대(회화과)에서 학·석사를 딴 김 화백은 만해 한용운과 공재 윤두서 등의 초상화를 그린 동양화가다. [사진 남원문화원]

3대 춘향 영정을 그린 김현철 화백. 서울대 미대(회화과)에서 학·석사를 딴 김 화백은 만해 한용운과 공재 윤두서 등의 초상화를 그린 동양화가다. [사진 남원문화원]

"신윤복 미인도 등 참고" 

새 영정을 두고 "못생겼다" "나이 들어 보인다" 등 외모 논란이 불거진 데 대해선 "사람마다 대상을 볼 때 각자 '필터'가 있다"며 "'미의 기준'이 같지 않은 건데 화가로서 누구 기준에 맞추겠냐"고 했다. 김 화백은 또 "'이도령이 반한 여성상이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해 예쁠 수도 있지만, 목소리나 눈짓·몸짓·태도 때문에 아름답게 보일 때가 더 많다"고 설명했다.

새 영정 속 춘향의 머리 모양과 옷차림은 이은주 안동대 교수 등 전문가 고증을 거쳤다. 이 교수는 "(춘향이) 금봉채·옥비녀 등을 사용한다는 것은 '벌생머리'를 했다는 의미"라고 했다. 벌생머리는 두 갈래로 땋은 머리를 말아 올려 좌우로 8자형을 만든 머리 모양이다.

이 과정에서 남원 지역 여고생 7명 얼굴도 참고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남원 여고생들이 '의문의 1패'를 당했다"는 말도 나온다. 이에 김 화백은 "학생들은 좋은 뜻으로 (모델로) 나섰을 텐데 논란 때문에 자기들이 '뭔가 잘못했다'고 생각할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남원문화원이 복식 전문가인 이은주 안동대 교수에게 의뢰해 만든 '2023 춘향 영정 복식 고증' 일부. 김현철 화백이 참고했다. [사진 남원문화원]

남원문화원이 복식 전문가인 이은주 안동대 교수에게 의뢰해 만든 '2023 춘향 영정 복식 고증' 일부. 김현철 화백이 참고했다. [사진 남원문화원]

김선지 평론가 "한국 미인형…이전 작품보다 우수"

일각에서는 '흑인 인어공주'를 내세운 디즈니 실사 영화 '인어공주'와 춘향 영정을 둘러싼 외모 논란에 대해 "가상 인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존중하지 않고, 혐오를 부추기는 소모적 논쟁으로 번지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흑인 인어공주는 영화 '인어공주'에서 주인공 에리얼 역할을 흑인 배우가 맡으면서 생겼다. 이를 두고 '빨강 머리 백인 인어공주'가 아니라는 이유로 낯설어하고, 혐오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흑인 인어공주'를 두고 "디즈니가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한 '블랙 워싱'에 집착해 전통적인 백인 공주 이미지에 맞지 않는 배우를 무리하게 캐스팅했다"는 비판과 "흑인이 인어공주 역을 맡을 수 없다는 생각은 인종 차별주의"라는 반론이 팽팽하다. '블랙 워싱(black washing)'이란 할리우드 등 서양 주류 영화계에서 무조건 백인 배우를 기용하는 관행인 '화이트 워싱(white washing)'에 빗대 인종적 다양성을 추구한다며 흑인 등 유색 인종을 등장시키는 추세를 비꼰 말이다.

이에 대해 『뜻밖의 미술관』 등을 펴낸 김선지 미술평론가는 최근 페이스북에 "어차피 환상 속 동화 나라 이야기일 뿐인데 빨강 머리 백인 공주가 아니라서 원작을 훼손했다고? 참 기가 차는 궤변"이라며 "새 춘향 영정은 훌륭하다"고 썼다. 김 평론가는 "새 영정이 현재 서구 미인형에 익숙해진 우리 미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서 그렇지, 성형하지 않은 일반적인 한국 미인형에 근접해 보인다"며 "색감을 비롯해 전체적인 예술적 완성도도 이전 작품들에 비해 우수하고, 그들(일부 시민단체)이 인정하지 않은 덕성이나 기품도 한층 깊이 있게 표현된 것 같다"고 평가했다.

 디즈니 '인어공주' 실사 영화 한 장면. [사진 월트 디즈니]

디즈니 '인어공주' 실사 영화 한 장면. [사진 월트 디즈니]

김은호 화백 친일 논란…62년 만에 교체

앞서 남원시는 기존 춘향 영정을 2020년 10월 철거했다. 김은호 화백이 1939년에 그렸다 1950년 한국 전쟁 때 유실돼 1961년에 다시 그린 초상화다.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705인에 김은호 화백이 포함되면서 영정 교체 여론이 일었다.

최초 춘향 영정은 1931년 1회 춘향제 때 강수주 화백이 그렸다는 설이 있지만, 낙관 등이 없어 확실치 않다고 남원문화원은 전했다. 30대 어사 부인 모습인 최초 영정은 한국 전쟁 중 일부 훼손됐지만, 현재 남원향토박물관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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