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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공포물과 평화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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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안나 성형외과 전문의·서점 ‘채그로’ 대표

이안나 성형외과 전문의·서점 ‘채그로’ 대표

영화 ‘올드보이’부터 드라마 ‘오징어 게임’까지 지난 20년간 살인범죄, 좀비, 디스토피아 등 핏빛 공포물이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하지만 현실의 우리나라는 가족 삼대가 전쟁을 경험한 적 없는 70년의 평화, 인류 역사에 드문 시대를 살고 있다.

일상이 전쟁 같은 빈곤으로 생존이 불투명할 때, 그 사회의 자살률은 현저히 떨어진다고 한다. 이런 시기에는 밝고 아름답고 따뜻한 이야기나 역경 극복 성장 스토리가 큰 인기를 얻는다. 외과의사들이 피 나오는 영화를 잘 안 보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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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독서모임에서 읽은 『서부전선 이상 없다』(1929)는 너무 처참해서 차라리 판타지 같았다. 독일 작가인 E M 레마르크가 19살에 제1차 세계대전 참전했던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이다. 영화로도 1930, 1976, 2022년 세 차례 각각 다른 버전으로 제작돼 모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자신의 이익을 기대하는 한두 명 어른들의 서명 때문에 서로 다른 나라들의 수천만 병사들이 아무 의미 없이 죽어야 했던 ‘광기의 시대’, 어느 한 병사의 이야기다.

이성과 과학 발전, 산업화가 선물한 풍요 덕에 유럽이 가장 빛났던 시절을 ‘벨 에포크’라고 부른다. 그 짧은 꿈의 끝에 찾아온 20세기에 1억 명 넘게 전쟁과 기근으로 죽어야 했다. 인간이 계속 더 진보하리란 생각이 얼마나 허황한 것인지, 인간은 언제든 ‘야만의 시대’로 퇴행할 수 있음을 역사는 보여준다.

1914년 1차대전에서 1989년 소련붕괴까지의 ‘극단의 시대’를 거친 이후 30여년간 인류는 믿을 수 없는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10년이 인류 역사의 가장 ‘위험한 구간’이 될 수 있다고 마이클 베클리 등은 『중국은 어떻게 실패하는가(원제 Danger zone)』에서 말한다. 인간 본성의 폭력성이 핏빛 공포물로 해소되는 시대, 풍요와 안정이 있는 이 기적의 시간이 더 오래 지속하기를.

이안나 성형외과 전문의, 서점 ‘채그로’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