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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청산가리"처럼...'마셔봐라 프레임' 갇힌 오염수 논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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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마셔 보라.”

지난 12일부터 사흘간 열린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를 두고 더불어민주당이 여권을 비판한 방식은 ‘방류수 음용(飮用)’ 논쟁이었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 14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 교육·사회·문화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 14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 교육·사회·문화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음용 논쟁은 대정부질문 첫날부터 시작됐다. 김성주 민주당 의원은 한덕수 국무총리에게 “안전이 검증되면 후쿠시마 오염수를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한 총리가 “세계보건기구(WHO)의 음용 기준에 맞다면 마실 수 있다”고 말하자 민주당은 “그렇다면 공수해오겠다”(김성주 의원) “총리님 직계가족과 같이 드시면 어떻겠느냐”(윤재갑 의원)라고 말하며 이슈를 키웠다.

이튿날 대정부질문에선 “오염수를 정말 마셔도 되나. 일본 총리냐”(어기구 의원)라는 친일 공세까지 추가됐다. 한 총리가 “제가 기준에 맞게 정화된 오염수를 마시겠다고 했지, 그냥 오염수를 마시겠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반박했지만, 민주당은 연일 “마실 수 있으면 일본이 왜 바다에 내다 버리겠느냐“(지난 14일, 이재명 대표)고 받아쳤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4일 국회에서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4일 국회에서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문재인 정부 때부터 이어진 오염수 방류 문제는 학계에서도 논란이 많은 사안이지만, 국회에선 ‘마실 수 있냐 없냐’라는 단순한 문제로 치환됐다. 정부와 야당의 공방이 거세질 수록,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검증 정확성과 다핵종제거설비(ALPS)의 성능 등 과학적 방법론에 대해 논쟁하거나 국제 외교 무대에서 일본의 오염수 방류를 막을 방법이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이뤄질 공간은 사그라들었다.

과학과 안전, 국제관계가 얽힌 문제를 단순히 ‘먹는 문제’로 전환해 이슈의 흐름을 주도하는 방식은 앞서도 여러 차례 사용됐다. 2008년 이명박 정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때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가 논의되자 진보 진영에서 광우병을 연상시키는 “뇌 송송, 구멍 탁”이란 구호를 앞세워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한 게 대표적이다.

이때 나온 유명한 발언 중 하나가 한 유명 연예인이 말한 “차라리 입에 청산가리를 털어 넣겠다”였다. 청산가리는 치사량이 0.15g인 대표적 맹독 물질인데, 이보다도 위험하다는 말에 금세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공포는 전국으로 퍼졌다. 15년이 흐른 지금은 한국은 연간 미국산 쇠고기 3조 600억원을 사들이는 최대 수입국이 됐다.

MBC가 2008년 4월 29일 방송한 PD수첩 광우병 보도 영상. 사진 MBC 캡처

MBC가 2008년 4월 29일 방송한 PD수첩 광우병 보도 영상. 사진 MBC 캡처

이명박 정부 때 4대강 사업을 비판하는 논리 중 하나도 먹는 문제였다. 2012년 일부 4대강에서 녹조가 발견되자 친야 성향의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녹조 라떼’라는 단어가 유행했고, 야당인 민주통합당(현 민주당)은 “4대강은 녹조라떼라는 말이 유행하는 어처구니없는 사업이며 낙동강은 독성 성분이 남아 위험한 물이 됐다”(이해찬 대표)고 주장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 경북 성주에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가 결정됐을 때도 표창원·손혜원 등 민주당 의원들은 성주에 달려가 춤과 함께 “전자파 튀김은 싫다”는 가사의 노래를 불렀다. 성주 특산물인 참외가 ‘전자파 튀김 참외’가 될 거란 말이 한동안 진보 진영에서 유행했다.

2016년 8월 3일 경북 성주 성주군청 앞에서 열린 ‘사드 반대 성주군민 촛불집회’에 참여한 민주당 의원들이 대중 가요를 개사해 사드 배치 반대 노래를 춤추며 부르는 모습. 오른쪽은 손혜원 의원, 가운데는 표창원 의원. 사진 오마이TV 유튜브 캡처

2016년 8월 3일 경북 성주 성주군청 앞에서 열린 ‘사드 반대 성주군민 촛불집회’에 참여한 민주당 의원들이 대중 가요를 개사해 사드 배치 반대 노래를 춤추며 부르는 모습. 오른쪽은 손혜원 의원, 가운데는 표창원 의원. 사진 오마이TV 유튜브 캡처

이밖에 2011년 오세훈 서울시장(당시 재선) 때 ‘무상급식 주민투표’ 역시 먹는 문제 프레임이 작동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당시 오 시장이 시장직까지 걸었던 이 논쟁은 초·중등 학생의 급식을 전면 무상으로 줄 것이냐 하위 50%에게만 줄 것이냐를 다투는, 즉 보편 복지냐 선별 복지냐를 다투는 거대 담론이었다. 하지만 그런 가치 싸움은 “애들 밥그릇 뺏자고 주민 투표를 하느냐”는 구호에 묻혔다. 결과는 투표율 미달로 부결, 오 시장은 사퇴했다.

진보 진영만 이런 건 아니다. “오염수 먹어보라”는 이번 민주당 공세에 있어서도국민의힘은 “문재인 정부는 4대강 보 해체로 물이 깨끗해졌다고 했는데 4대강 물 마셨냐, 막말하는 의원님들, 4대강 물부터 마시라”(박대출 정책위의장)고 맞대응했다. 이내영 고려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먹는 문제로 프레임을 단순화하면 정파적으로 유리해질 순 있겠지만, 사안에 대한 건전하고 과학적인 토론이 차단된다”며 “이는 결국 국민이 잘못된 판단을 하게 하여 모두가 피해를 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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