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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AI, 지금 뒤처지면 해외 빅 테크 식민지 된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44호 30면

EU 세계 첫 규제안 통과…속내엔 미국 빅 테크 견제

미·중뿐 아니라 기술 뒤지는 유럽까지 사활 건 경쟁

지나친 규제 인해 국내 기업 발 묶이는 일은 없어야

유럽연합(EU) 입법기구인 유럽의회가 지난 14일(현지시각) 인공지능(AI) 관련 규제 법안의 초안을 세계 최초로 통과시켰다. 챗GPT 같은 생성형 AI 개발사에 답변 출처 데이터 공개는 물론 불법 콘텐트 생성 방지 장치 마련을 의무화하고, 공공장소에서의 안면 인식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위반 시 연 매출의 6%(최대 3000만 유로) 과징금을 부과한다.

규제 논의는 미국에서도 활발하게 진행돼 왔다. 챗GPT 개발사인 미국 오픈AI사의 샘 올트먼 CEO는 지난달 미 의회 청문회에 참석해 “AI 관련 표준을 관리하는 새로운 기관을 설립하고 이를 어기면 AI 개발 허가를 취소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표면적으론 빅 테크 기업의 과도한 수익 추구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온 EU 당국과 AI 관련 기술 개발을 선도해온 미국 기업이 한목소리로 규제를 주장하는 듯 보이지만, 속내는 사뭇 다르다. 선두 주자는 후발 주자의 진입을 늦추는 수단으로, 후발 주자는 선두 주자의 독주에 제동을 걸겠다는 계산으로 규제를 내세운다. 이번 초안 통과 직후 오픈AI가 “유럽에서의 사업을 철수할 수도 있다”는 불만을 보인 것은 이런 속내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이 미국과 AI 경쟁을 벌이는 와중에 빅 테크 기업 하나 없는 유럽마저 규제를 AI 주도권 다툼의 도구로 들고 나왔다. 세계가 가히 AI 수 싸움 중이다. 여기엔 생성형 AI가 향후 10년간 세계 총생산(GDP)을 무려 7%(약 7조 달러) 끌어올릴 것이라는 전망(골드만삭스)이 깔렸다. 여기에 AI 대응 여부에 따라 국가 위상이 재정립될 수도 있다는 각국의 현실 인식이 가세했다. 이런 중대한 전환기를 맞아 경쟁에서 도태되면 특정국 빅 테크 기업에 온 나라 경제가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작동하고 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최근 유럽 최대 스타트업 축제인 비바테크에서 “우리는 너무 느리게 대응하고 있다”고 위기의식을 토로했다. 영국 보수당 정부는 지난 3월 미국에 맞서 독자 능력을 키우겠다며 브릿GPT 개발을 위한 첨단 슈퍼컴퓨터에 9억 파운드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야당인 노동당은 아예 100억 파운드를 더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칫 실기하면 빅 테크 종속을 막기 어렵다는 불안감이 여야를 관통한 것이다.

구글에 맞서 검색 시장을 지켜낼 정도로 역량 있는 IT 기술 및 기업을 보유한 한국은 유럽보다 형편이 낫지만, 위기감은 마찬가지다. 지난달 말 국내 텍스트 생성 AI 스타트업인 뤼튼테크놀로지스가 주관한 콘퍼런스에서 성낙호 네이버클라우드 하이퍼 AI 기술총괄은 “글로벌 기업이 사다리를 걷어차면 한국은 순식간에 AI 식민지로 전락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서비스 초기 진입장벽을 낮춰 의존도를 높여 놓은 후 수수료를 크게 올려 막대한 이익을 취해온 해외 빅 테크 기업의 행태가 생성형 AI 분야에서 되풀이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가령 오픈AI의 챗GPT는 각 기업이 자사 서비스에 챗GPT를 결합할 수 있는 API(응용프로그램 인터페이스)를 현재 매우 저렴하게 제공하고 있지만, 지배력을 갖추고 나면 가격을 크게 올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지금 각국은 미국 빅 테크에 대항할 수 있도록 자국 관련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AI가 초래할지 모를 재앙에 대비한 적절한 규제는 필요하지만, 성급한 규제가 기업 발목을 잡아 한국이 AI 주도권을 잃는 결과는 경계해야 한다. 현명한 정책적 판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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