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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또 하나의 장군’과 핵 대피소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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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4호 31면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

지난 5월 말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발사 직후 우리 측의 민방위 대응이 난맥상을 드러냈다. 한동안 비판과 비난이 이어졌지만 또 다른 시급한 일들이나 일상에 묻혀 빠르게 잊혀 버리는 것 같다. 그 와중에 얼핏 지난 날에 생각이 미쳐 한때 중요한 위치에 있던 분에게 전화를 걸고, 내가 오래전에 핵 대피소를 빨리 준비해야 한다는 제안을 한 일을 기억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때는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초기였지만, 나는 비핵화 협상이나 한반도의 평화 정착 노력과는 별도로 우리 나름대로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나 생각했다. 필자의 조잡한 생각은 우선 지하철역이나 지하주차장 같은 활용 가능한 시설들을 보완하고, 별도로 특히 인구밀도가 높은 아파트단지 주변 학교 등에 새롭게 지하주차장을 건설해 핵 대피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골자였다. 내 전화를 받은 분은 당시 나의 제안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으며, 대피소를 준비하면 건설 경기가 활성화되겠다는 말을 자신이 한 것도 생각난다고 했다. 전문가도 아닌 형편에 이런 제안을 한 것은 우리의 특이한 안보 상황에 대한 나름의 우려 때문이었다.

민방위 대응 부실 정부 책임이 우선
안보 현실에 무감각한 것도 한 원인
외부 상황과 내부 군사적 균형 변동
늦었지만 민방위 문제 잘 챙겨 봐야

선데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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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보 상황에는 세계 여러 나라들이 공유하고 있는 일반적 문제와는 다른 특별한 면이 하나 있다. 1차 핵 위기 때였다. 김일성 주석은 미국과의 전쟁 전망에 관해 논의하면서, 만약 북한이 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을 했는데 군 고위 책임자들이 모두가 당황해서 답을 못 했다. 그때 아드님, 김정일 위원장이 “북한이 없는 지구는 있을 필요가 없다. 지구를 깨버려야 한다”는 답을 하자 김 위원장은(아드님의 철없는 답을 엄하게 질책하는 대신) 크게 기뻐하고 ‘또 하나의 장군’이 출현했다고 칭찬할 뿐 아니라 이 말씀을 널리 알리고 ‘삼대 혁명 전시관’에 게시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다. 폐쇄된 체제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지배자는 자기들의 권력이 위협을 받는 경우, 주변과 공동 자살을 강행하려 하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패전에 직면하자 독일 민족이 모두 자기와 함께 죽기를 바랐고, 자기가 차지할 수 없게 된 파리는 불을 질러 파괴하려 하였다. 패전에 직면한 일본의 군국주의자 일부도 항복을 하기보다 1억의 일본인이 모두 자신들과 최후를 함께하기를 바랐다. 1인 지배하의 폐쇄적인 유사 종교 집단 중에도 이런 현상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리고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은 독재자들에게 이런 망상을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게 됐다.

한반도의 안보 상황에서는 ‘상호확증파괴(MAD)’와 같은 대응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한 일면이 있다. 외부의 위협 없이도 북한 체재가 존망의 위기에 빠진다면 권력층은 주변과 동반 자살을 하려 할 수도 있다. 북한 핵 위기 초기에 핵 대피소 제안을 한 것은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상상하기에도 끔찍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피해 규모를 줄여 세상을 새롭게 이어갈 사람들이 살아남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민방위 체제가 부실하다고 하기보다 없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가 된 현실에는 정부의 책임이 우선이겠지만, 일반 국민들이 우리 안보 현실에 관하여 비정상적이라고 할 만큼 무감각한 것도 한 원인이 아닌가 한다. 정부로서도 핵 대피소 같은 문제는 뒤로 미뤄둔 채 북한과의 관계를 잘 관리해 비핵화도 이루고 나아가 평화와 함께 궁극적인 통일도 이룰 수 있으리란 낙관에 의지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런 현실의 배경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적어도 정전 협정이 발효된 지 두 세대가 넘는 기간 동안 정부는 큰 위기 없이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이런 성공을 뒤돌아보는 것에는 두 가치 차원의 고려가 있다. 첫째는 국내적 차원이다. 정전 이후에 양측 모두가 협정의 규약을 충실하게 지킨 것은 아니었지만, 특히 북한은 여러 가지로 군사적인 도발을 지속적으로 감행했다. 천안함 폭침 같은 특수 형태의 소규모 도발에서 울진·삼척 공비 사건 같은 상당 규모의 병력이 동원된 비정규전 양상을 보인 것도 있었다. KAL기 폭파나 대통령 암살 기도도 있었다. 휴전선 인근에서 상당한 규모의 비정규전을 감행해 한때 양측의 사상이 수백의 규모에 이른 일도 있었다(문관현, 임진스카웃 Imjin Scouts 1965~1991 참조).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면서 정치·경제 양면에서 세계적 수준의 발전을 기할 수 있었던 것은 한·미동맹을 기축으로 하는 저지와 상황 통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차원에서 한국전쟁 이후에는 주변 강대국들이 모두 한반도에서 또 한번의 위기가 발생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겼다. 이런 외적 요인도 한반도에서 일정한 안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됐다. 정전 협정 이듬해에 열린 이른바 정치 회담에서 몰로토프 소련 외무장관은 영국의 이든에게 ‘한반도에서 남북한이 함께 살기 위해서는 한동안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뜻의 말을 건넸다. 이제는 한반도 안과 밖 모두에서 새로운 상황을 맞고 있다. 외부의 상황도 내부의 군사적인 균형도 그렇게 안정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많이 늦었지만 민방위 문제를 챙겨볼 때이다.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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