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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군화교’ 위서방·강혜림, 중공군으로 위장 침투해 적 격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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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4호 02면

6·25 정전 70년 기획, 잊혀진 외인부대

 지난달 15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6·25전쟁에 참전한 화교 위서방 과 강혜림 추모 행사가 열렸다. 김육안 재한화교참전동지회승계회 회장(왼쪽 넷째), 권태오 예비역 중장(왼쪽 다섯째), 량자오린 전 주한대만대표부 주임영사(오른쪽) 등이 참석했다. [사진 김육안]

지난달 15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6·25전쟁에 참전한 화교 위서방 과 강혜림 추모 행사가 열렸다. 김육안 재한화교참전동지회승계회 회장(왼쪽 넷째), 권태오 예비역 중장(왼쪽 다섯째), 량자오린 전 주한대만대표부 주임영사(오른쪽) 등이 참석했다. [사진 김육안]

‘국립묘지 안장에 관한 안건…조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수신 총무처 장관. 발신 국방부 장관. 1989년 12월 21일, 청와대 국무회의는 이런 내용의 의안 한 건을 심의 의결한다. 그리고 국방부는 그의 이름을 적었다. 위서방(魏緖舫·웨이쉬팡·1923~1989).

지난 13일 국립서울현충원 12묘역. 웨이쉬팡은 이곳에서 영면 중이다. 그의 옆에 또 다른 이가 잠들어 있다. 강혜림(姜惠霖·장후이린·1925~1951). 한국에서는 좀처럼 쓰지 않는 한자 이름을 가진 이들은 누구인가.

2022년 기준 8만811위를 모시고 있는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일제의 제암리교회 학살을 세계에 알린 영국의 석호필(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와 화교인 웨이쉬팡·장후이린 등 외국인이 세 명 안장돼 있다. 현충원 관계자는 “웨이쉬팡·장후이린의 경우, 이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안쪽의 24묘역에서 별도의 외국인 묘역(12묘역)을 조성해 이장했다”고 밝혔다. 이들을 이장한 날(2012년 5월 15일)을 기념해 추모행사가 매년 열리는데, 6·25 정전 70주년인 올해 행사를 앞두고 ‘외국인 묘소’ 푯말이 새롭게 세워졌다. 웨이쉬팡·장후이린의 묘비에는 ‘종군화교(從軍華僑)’라고 새겨져 있다. 전쟁터에 나선 화교라는 뜻이다. 그리고 1989년 12월의 의안에 국방부는 웨이쉬팡에 대해 ‘1950년 10월 보병 제1사단의 평양 진격 시 중국인 동지와 첩보 대원으로 참전’했다고 썼다.

중앙SUNDAY는 ‘웨이쉬팡과 장후이린의 6·25’를 추적했다. 묘비에 새겨진 이들의 행적을 토대로, 한성화교협회 회장을 지낸 친위광(秦裕光·1916~1999)씨가 1979년 12월에 기고한 글(남기고 싶은 이야기들)과 화교 관계자들의 증언, 각종 전사(戰史)자료를 발판 삼았다.

#위서방·강혜림, 현충원 12묘역 영면

중앙일보 1979년 12월 3일자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 실린 김안일 장군(왼쪽)과 위서방이 악수를 하는 사진. [중앙포토]

중앙일보 1979년 12월 3일자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 실린 김안일 장군(왼쪽)과 위서방이 악수를 하는 사진. [중앙포토]

6·25전쟁은 1950년 10월 새 국면을 맞는다. 93세 노병 송이남(가명)옹이 “평양을 함락시켰고, 중공군이 벌떼처럼 내려왔다”라던 그 10월이었다. 〈중앙SUNDAY 6월 10일자 5면〉

이때 웨이쉬팡(중국 랴오닝 출신)과 장후이린(중국 산둥)은 평양에서 한중반공애국청년단(韓中反共愛國靑年團, 이하 반청단) 단장과 부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 둘은 이미 중국 패권을 놓고 벌어진 국공내전(國共內戰, 1927~1950) 때 국민당정부군(국부군·國府軍)으로 참전한 경험이 있었다. 1000여 명에 달했던 반청단은 6·25가 터지자 북한 인민군의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1950년 10월 20일 평양이 ‘함락’되자 웨이쉬팡은 국군 제1사단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에게 참전을 허용해 달라고 요청했다. 반청단은 평양화교반공애국보위단(平壤華僑反共愛國保衛團)을 거쳐 1사단 내 30명의 ‘중국수색대’로 거듭났다. ‘외국인’이란 이유로 계급과 군번은 없었다. 웨이쉬팡이 대장, 장후이린이 부대장이었다.

국제사회는 중공군이 참전했는지 오리무중이었다. 중국수색대는 1950년 12월 14일 경기도 연천 고랑포리로 침투해 중공군 1명을 생포했다. 비로소 중공군이 38선 이남까지 진출했다는 것을 알렸다. 중공군에게 밀린 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주며 평택~제천~영월~삼척 선까지 내려갔다. 여기서 더 밀리면 미군은 한반도를 포기한다는 말도 있었다. 중공군이 보급 문제로 주춤하고 있던 1951년 2월 반격이 이뤄졌다. 미군 25사단 27연대가 이른바 ‘울프하운드 작전’으로 서울로 향하는 길을 뚫었다.

서울의 턱밑, 과천에 국군 1사단 15연대 중국인특별수색대(명칭 변경, 이하 중국인수색대)가 2월 2일 투입됐다. 중공군으로 위장해 적진에 침투해 진지 8곳을 격파했다. 장후이린은 실탄이 떨어지자 백병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장후이린의 유해는 1964년 국무회의 의결로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다시 찾은 관악산에서 한강 너머가 보였다. 15연대장이었던 김안일 대령은 중국인수색대를 그 한강 너머로 정찰 보냈다. 중공군의 저항은 없었다. 친위광 회장은 중앙일보에 “당시 미군이 인천 쪽으로 빈 트럭을 보내는 등 위장 전술에 중공군이 속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힌 바 있다. 15연대는 3월 14일 한강을 넘고 마포를 거쳐 중앙청에 다시 태극기를 꽂았다. “서울은 이렇게 한국전쟁 개막 이래 네 번째의 주인 교대를 기록하게 됐다”고 손정목 서울시 시사편찬위원장은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 적고 있다. 백선엽 장군은 회고록에 당시 상황을 전하며 ‘소규모 수색대를 서울로 보내 직접 적정을 탐색하기도 했다… 화교 수색대는 이때에도 실력을 발휘했다’고 썼다.

서울을 재탈환한 뒤 15연대는 경기도 북쪽으로 진격한다. 4월 28일, 중국인수색대는 녹번리(당시 고양군, 현재는 서울 은평구) 전투에 투입된다. 적에게 노출됐다. 총격전이 벌어졌다. 적진 가운데에 갇혀버린 수색대는 웨이쉬팡을 포함, 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웨이쉬팡은 4시간의 대수술 끝에 살아났다.

#살아남은 화교들, 중식당 꾸려 생계

6·25 당시의 중공군. 종군화교들은 1950년 10월 중공군의 참전으로 활동이 본격화했다. [중앙포토]

6·25 당시의 중공군. 종군화교들은 1950년 10월 중공군의 참전으로 활동이 본격화했다. [중앙포토]

“6·25가 터지자 아버지는 화교 부대에 지원했습니다. 중국 산둥 출신이지만 제2의 고향인 함흥에 있는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걸고요.”

중국인수색대는 녹번리 전투 이후 활약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대신 새 화교 부대가 만들어졌다. 김육안 재한화교참전동지회승계회 회장은 “아버지가 계셨던 부대는 SC지대라고 불렀다”고 밝혔다. SC지대는 육군첩보부대(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HID) 산하 4863부대를 말한다. HID가 육군본부에서 독립한 1951년 3월 창설했다. ‘SC’는 한국 화교 청년조직을 뜻하는 ‘서울 차이니스(Seoul Chinese)’에서 따왔다. 대만군 현역 장교인 뤄야퉁(羅亞通)과 류궈화(劉國華)가 각각 대장과 정치위원이 됐고 한국군 이백건이 부대장에 임명됐다. 6·25 발발 후 계속 파병 의사를 밝혔지만 미국의 반대로 막혔던 중화민국이 이런 방식으로나마 참전한 것이었다.

SC지대에 화교 200명이 모였다. 이 중 무장대원은 70여 명. 김 회장의 아버지 김성정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들은 유창한 중국어·한국어를 번갈아 쓰며 때로는 중공군 복장을, 때로는 인민군 복장을 했다. 친위광 회장은 “SC지대원들은 12명이 한 조가 돼 전방에 분산 배치됐고 주 임무는 적 후방에 침투, 첩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육해공(陸海空) 루트로 북한 전방위를 교란했다”고 중앙일보에 남겼다. 서부의 연백·해주, 중부의 철원·금화·평강에는 육로로, 더 북쪽의 평남 성천·순천에는 공중으로, 함흥 쪽에는 해상으로 침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장대원 70여 명 중 살아남은 이는 20명뿐이었다. 김 회장의 오촌 당숙 정의씨도 SC지대원이었는데, 1952년 낙하산으로 북한에 침투하던 중 실종됐다고 한다.

6·25전쟁 중 중국인 부대인 SC지대에서 활약한 김육안 회장의 아버지 김성정씨(왼쪽)와 오촌 당숙 김정의씨. 김정의씨는 낙하산으로 침투 중 실종됐다. [중앙포토]

6·25전쟁 중 중국인 부대인 SC지대에서 활약한 김육안 회장의 아버지 김성정씨(왼쪽)와 오촌 당숙 김정의씨. 김정의씨는 낙하산으로 침투 중 실종됐다. [중앙포토]

SC지대는 1953년 7월 ‘퇴조해상(退潮海上)’ 침투작전을 수행한다. 깊숙이, 함경남도 갑산 등 백두산 일대로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40명은 7월 18일 함경남도 함흥 부근 퇴조 포구에 상륙한 뒤 백두산 어귀에 이르렀을 무렵 교전이 벌어졌다. 돌아온 이는 5명뿐이었다.

1971년, 정부는 SC지대의 참전을 공식 인정하며 그해 12월 4일 화교로 6·25에 참전한 53명에게 종군기장을 수여했다. 1973년엔 10명에게 보국포장을 수여했다. 김 회장의 아버지 김성정씨는 작고 3년 전인 1998년에 국가유공자가 되기 위해 귀화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영면할 수 있었지만, 가족 묘지로 모셨다고 한다. 참전동지회 관계자는 “종군화교들은 현재 생존자가 없고, 대부분 계급과 군번도 없어 유공자로 모실 자료가 부족해 안타깝다”고 전했다.

휴전 뒤 한의사가 돼 무료 진료 봉사를 했던 웨이쉬팡은 1989년 6월 25일에 사망했다. 6·25, 공교롭다. 1971년 12월 4일의 종군기장 수여식에서 그의 표정이 감개무량과 시원섭섭 사이 어디쯤인 것으로 보인다면 과한 것일까. 살아남은 종군화교들은 중식당을 꾸리며 살았다. 혹여, 어느 중식당에 가면 한번 물어보자. “종군화교 후손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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