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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먹물(墨汁)요리 역사 … 낙제하면 먹물이 한 사발

중앙일보

입력

먹물 만두. 사진 소후

먹물 만두. 사진 소후

먹물 두부(墨汁豆腐), 먹물 해물국수(墨汁海鮮麵), 먹물 만두(墨汁餃子)에 먹물 밥(墨汁飯) 먹물 갈비구이(墨汁燒排骨) 등등.

눈길 끄는 중국 음식들인데 자칫 종이로 소를 만들어 빚었다는 만두나 석회 달걀처럼 먹물을 섞은 불량식품들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은 아니다. 오히려 건강에 좋다며 유행처럼 퍼지는 블랙푸드다.

새까만 색이 마치 묵즙(墨汁)이라는 이름처럼 먹물을 풀어 놓은 것 같지만, 실제 그럴 리는 없고 천연 색소인 오징어 먹물을 활용해 요리한 음식들이다.

고문헌을 비롯해 이런 저런 기록을 찾아봐도 중국 음식 중에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오징어 먹물 요리가 있었다는 흔적은 없으니 최근에 생긴 음식들이 분명하다. 실제로 먹물 요리, 묵즙 음식은 이탈리아 요리 등에서 영향을 받아 만든 중국식 퓨전 음식이다.

이탈리아의 오징어 먹물 요리는 우리한테 이미 익숙한 부분이 있다. 오징어 먹물 스파게티를 비롯해 먹물 리조또에, 먹물 피자까지 다양한 음식들이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통해 한국에 선보였다. 그 때문인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징어 먹물 요리를 이탈리아 고유의 전통 음식으로 생각하는데 실은 그렇지도 않다. 오징어가 많이 잡히는 지중해 연안 지방에서는 보편적으로 먹는 음식이라고 한다. 그런 만큼 스페인에도 오징어 먹물로 조리한 볶음밥, 빠에야가 있고 크로아티아에도 오징어 먹물 음식을 어렵지 않게 먹을 수 있다.

조리해 놓은 음식 색깔이 시커멓기에 얼핏 먹지 못할 음식처럼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오징어 먹물이 소화도 잘 되고 심혈관 질환 예방과 면역력을 높이는데 좋다고 소문이 나면서 한때 일본에서 크게 유행했고 우리나라에서도 오징어 먹물 빵에, 짜장면, 오징어 먹물 떡볶이까지 널리 퍼진 적이 있다. 중국의 먹물 두부와 오징어 먹물에 재서 굽는 먹물 갈비 등도 유행 트렌드를 탄 것 같은데 어쨌든 아시아에서는 오징어 먹물 요리가 경제발전 순서에 따라 퍼져나가는 것 같아 흥미롭다.

오징어 먹물 요리는 서양에서 비롯됐고 역사적으로 뿌리도 깊다. 고대에는 의약품으로 주로 사용했는지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의사 셀수수가 남긴 의학서 『메디치나』에도 보인다. 식욕을 돋우는데 좋고 변비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 것을 보면 이때도 오징어 먹물 요리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음식이 본격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긴 세월이 흐른 후인 르네상스 이후다. 아랍과의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베니스의 상인과 귀족들이 미각의 극치를 맛보기 위해 발달시켰다고 한다. 시각적으로 아름다움의 절정을 이루는 검은 색을 강조하면서 미각적으로는 부드러운 바다의 향기를 요리에 담아내는 재료로 오징어 먹물을 소스로 발전시킨 것이 그 출발점이라고 한다.

그러면 동양, 특히 중국에서는 오징어 먹물을 어떻게 활용했을까? 일단은 먹물 대신 썼다. 오적묵(烏賊默)의 서약이라는 말이 있다. 오징어 먹물로 서명한 약속인데 일종의 사기 계약이다. 오징어 먹물로 글씨를 쓰면 처음에는 또렷하게 보여도 시간이 흐르면 먹물이 마르며 글씨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한다. 그러니 계약한 적 없다고 우길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런 성질을 이용해 암호로 사용했다. 다시 물에 적시면 글씨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약으로도 활용했다. 당나라 의학서 『본초습유』에 오징어 먹물은 피가 뭉쳐 가슴이 아플 때 효과가 있다고 나온다. 심혈관 질환에 좋다는 소문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식용으로는 쓰지 않았던 모양이다.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대신 사람한테는 오징어 먹물이 아닌 진짜 먹물을 먹였다. 6세기 후반 남북조 시대의 북제(北齊) 때 있었던 일이다. 중국에서 과거제도는 수나라 때 시작됐지만 북제에서도 인재 선발고사가 있었다. 지방 호족과 귀족 세력의 추천을 받아 황제 면전에서 직접 시험을 본 후 그 중에서 똑똑한 인재를 뽑아 관리로 선발했다.

하지만 권력자 집안의 농간으로 실력은커녕 엉터리 자제를 추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렇기에 시험 중에 글자를 제대로 쓰지 못하거나 시험 후 문장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엉망인 답안지를 제출한 자는 작성자를 추적해 먹물을 한 되씩 먹였다.

이어 수나라에서도 시험성적이 정말 형편없거나 부정행위를 하다 적발될 경우에도 먹물 한 되를 마시게 했다고 『수서(隋書)』 「예의지」에 나온다. 나중에는 이런 황당한 규정이 사라졌지만 비아냥거릴 때 쓰는 “먹물 꽤나 마신 것 같다”는 말도 저절로 생긴 것 아니라 역사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그래도 먹물 한 되를 먹일 만큼 왜 그토록 모질었을까 싶지만 나름 배경이 있다. 과거제도는 인재 선발이 기본 목적이지만 지방 영주와 귀족 세력을 견제해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을 실현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렇기에 엉터리 같은 호족의 자제에게 먹물을 먹여 벌했던 것이다. 오징어 먹물이 됐건 진짜 먹물이 됐건 먹물 식용(?)의 용도가 흥미롭다.

윤덕노 음식문화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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