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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봉투법 닮은꼴' 판결에…재계 "파업 손배 청구 막혔다" 반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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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관계자들이 지난 19일 오후 국회 앞에서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조법 2·3조 개정운동본부 공동대표단 단식농성 돌입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노총 관계자들이 지난 19일 오후 국회 앞에서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조법 2·3조 개정운동본부 공동대표단 단식농성 돌입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법원에서 이른바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의 입법 취지에 가까운 판단이 나오면서 산업 현장에선 “사실상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노조원에게 면죄부를 주는 꼴”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15일 현대자동차가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소속 조합원 4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를 판결한 원심을 깨고 부산고법에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이날 설명자료를 통해 “개별 조합원의 책임은 노조에서의 지위와 역할, 쟁의행위 참여 경위와 정도, 손해 발생 기여 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위법한 쟁의행위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을 산정할 때 ‘조합원 개별 기여도’를 고려해 책임 범위를 정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된 노란봉투법과 유사한 취지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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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계에선 현실적으로 개별 조합원의 불법행위 가담 정도를 일일이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강조한다. 수십, 수백명의 노조원이 복면과 마스크를 쓰고 시설을 점거할 경우 개개인의 신원조차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황용연 한국경영자총협회 노동정책본부장은 “회사 측에 조합원 각각이 불법행위에 가담한 정도를 파악해 입증하라는 것인데, 이는 손해배상 청구를 원천적으로 제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며 “조합원 개개인의 귀책 사유나 손해에 대한 기여도를 사용자가 개별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결국 이번 판결로 인해 기업이 피해를 입어도 손해배상을 청구할 길이 차단되면서 불법행위가 확대될 우려가 크다. “분쟁을 예방하고 법적 안정을 추구해야 할 대법원이 오히려 산업현장의 혼란을 야기하고 노사갈등을 조장하고 있다”(강석구 대한상공회의소 조사본부장)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당사자인 현대차 관계자도 “대법원 판결에 대해 아쉽게 생각한다. 산업계에 미칠 파장도 우려된다”고 밝혔다.

기업이 개별 손해배상 책임을 입증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충돌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정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앞으로 쟁의행위가 발생했을 때 기업 측에선 개개인에 대한 입증을 시도하게 될 텐데, 채증 등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무력 충돌이 생길 수 있다”며 “정당한 파업도 위법한 파업으로 변질되는 등 산업 현장 혼란이 확대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판결이 자칫 ‘불법행위가 있어도 손해배상 책임에서 면제된다’는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도 있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판결 취지와 다르게) 자칫 위법한 쟁의행위에 대해서도 책임을 면하게 될 수 있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도 있다는 점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24일 오전 전체회의를 열어 이른바 ‘노란봉투법’의 본회의 직회부를 야당 단독으로 의결했다. 이날 여당 간사인 국민의힘 임이자 의원(왼쪽 둘째)이 본회의 직회부 상정에 대해 전해철 위원장(오른쪽)과 야당 간사인 더불어민주당 김영진 의원에게 항의하고 있다. 뉴스1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24일 오전 전체회의를 열어 이른바 ‘노란봉투법’의 본회의 직회부를 야당 단독으로 의결했다. 이날 여당 간사인 국민의힘 임이자 의원(왼쪽 둘째)이 본회의 직회부 상정에 대해 전해철 위원장(오른쪽)과 야당 간사인 더불어민주당 김영진 의원에게 항의하고 있다. 뉴스1

반면 노동계에선 기업의 과도한 손해배상 청구가 제한될 것이란 기대감이 나오고 있다. 민주노총은 이날 성명을 내고 “쟁의행위로 인한 개별 조합원의 손해배상 책임을 제한하고, 쟁의행위와 손해 발생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엄격히 판단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향후 쟁의행위 시 개별 조합원에 대한 손해배상청구 등이 일정하게 제한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나아가 대법원이 노란봉투법 입법의 정당성을 부여했다고도 노동계는 보고 있다. 한국노총은“쟁의행위에 대한 사측의 묻지마식 손해배상 청구에 경종을 울리는 중요한 판결로, 현재 국회 본회의 문턱에 계류돼있는 노란봉투법의 정당성을 대법원이 확인해 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본회의로 직회부된 노란봉투법은 의결이 이뤄지더라도 양곡관리법·간호법과 마찬가지로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입법되지 않더라도 이번 대법원 판결로 사실상 유사한 효력을 갖게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대법원 판결은 법리 해석에 대한 기준점이 되는 만큼 향후 하급심 판단이나 법률 해석 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정부는 대법원 판결이 노란봉투법의 입법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고용노동부는 “
이번 판결은 개별 조합원의 손해배상 책임을 단체인 노동조합보다 낮게 책정해야 한다는 법리로, 조합원들의 귀책 사유 등을 고려해 배상액을 경감하자는 취지”라며 “기업이 개별 조합원의 파업 가담 정도, 귀책 사유를 하나하나 파악해 개별 조합원별로 손해배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노조법 2·3조 개정안과는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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