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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진중권 칼럼

선거가 세탁기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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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진중권 광운대 교수

진중권 광운대 교수

“지도도 나침반도 없는 ‘길 없는 길’을 걸어 나가겠다.” 조국 전 장관이 자신의 SNS에 글을 올렸다. 평산마을을 방문해 문재인 대통령과 같이 있는 사진도 함께 올렸다. ‘길 없는 길’이 뭘 의미하는지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결국 다음 총선에 나오겠다는 얘기 아니겠는가. 아내가 도합 5년의 형을 받고, 본인도 1심에서 징역 2년의 형을 받았다. 게다가 며칠 전엔 서울대에서 ‘파면’이라는 중징계까지 받았다. 남들은 이미 그것만으로 그의 사회생활이 끝났다고 보나, 본인은 여전히 사회적 생명에 대한 강한 집착과 미련을 드러내고 있다.

‘지도도 나침반도 없는 길 없는 길’, 즉 총선 출마는 그에게 남은 마지막 구원의 동아줄이다. 총선에서 당선된다는 것은, 유권자들로부터 자신이 저지른 사법적-윤리적 과오를 사면받는 길, 아니, 애초에 그런 ‘과오’ 자체가 없었음을 정치적으로 인정받는 길이 된다.

‘길 없는 길’ 운운한 조국 전 장관
‘민주당 밖 민주당 후보’ 가능성
검찰독재 프레임 총선 활용할 듯
선거가 한풀이 푸닥거리 돼서야

법원의 판사들은 공정이라는 ‘보편적’ 기준에 따라 사법적 판단을 내리고, 법정 밖의 사회는 이른바 ‘보편적’ 상식에 따라 윤리적 판단을 내린다. 하지만 투표장의 유권자들은 진영논리에 따라 ‘당파적’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이 허점이 그가 말하는 ‘길 없는 길’의 실체다. 적어도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조 전 장관은 법적으로는 무죄, 윤리적으로 무결한 것으로 여겨진다. 어차피 투표장에 나오는 이들의 절반은 민주당 지지자들일 터. 거기서 승리하면 자신의 법적·윤리적 과오를 정치적으로 사면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평산마을 방문은 사실상 출사표라 할 수 있다. 민주당의 대선 주자들이 출마를 앞두고 봉하마을을 방문하는 것과 같은 절차다. 문재인 대통령이 함께 사진을 찍어준 것은 출마를 ‘재가’했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이는 물론 친문 지지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민주당은 득실계산에 바쁘다. 그가 출마하면 일단 강성 지지층들을 결집시키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검찰과의 법정 싸움에 참패하여 열패감에 빠져 있던 지지자들에게 사법적 판결을 정치적으로 번복할 기회를 제공해 그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조국의 강을 건넜다’고 선언한 마당에 그를 입당시키고 공천까지 주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 경우에는 민주당 강세지역에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하면 된다. 꼭 설사 민주당이 그 지역에 후보를 내더라도 체급의 차이 때문에 사실상 단일화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의 출마를 부추기는 쪽에서는 그쪽으로 가닥을 잡은 모양이다. “민주당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나간다”(김의겸). 공식적으로는 그의 출마로 인한 정치적 부담을 끊어내되 ‘사실상의’ 민주당 후보로 여겨지는 정치적 상징자본만은 선거에 철저히 활용하겠다는 얘기다.

문제는 출마의 명분이다. 민주당이 세 번의 선거에서 연거푸 패배하고 결국 정권까지 내주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 자신이 아닌가. 인물난으로 허덕이던 국민의힘 측에 대통령 후보를 만들어 바친 것도 결국 자신인데, 무슨 면목으로 출마하겠다는 것인가. 하지만 명분이야 만들면 그만이다. 조 전 장관 자신이 이미 명분을 제시했다. “문재인 정부의 모든 것이 부정되고 폄훼되는 역진과 퇴행의 시간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 즉, 윤석열 정권의 역진과 퇴행을 막아 문재인 정권의 성과를 지키겠다는 것이다.

이 명분이 동시에 민주당이 내년 총선에 사용할 ‘프레임’이기도 하다. 사법 리스크, 리더십 리스크에 빠진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는 총선 그림이 잘 안 그려진다. 하지만 조 전 장관은 이른바 ‘정치검찰’의 희생양(?)으로서 “검찰 독재의 대항마로서의 상징적인 성격”(김의겸)을 띤다. 물론 조국 사태로 등을 돌린 중도층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프레임이다. 하지만 ‘이 정권에서 하는 일이라곤 수사와 감사밖에 없냐’고 푸념하는 일부 중도층에게는 이 말도 안 되는 프레임이 먹힐 수도 있다. 그 결과는 이 정권이 남은 1년 동안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아직은 성급한 가정에 불과하지만, 세간에서 얘기되는 대로 국민의힘이 여기에 맞불을 놓기 위해 한동훈 장관을 차출하려 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그 일이 벌어지면, 선거판이 조국사태가 2라운드가 되어 나라 전체가 다시 2019년의 상황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듣자 하니 우병우 전 민정수석도 출마의 의향을 밝혔단다. 문재인 정권의 신원(伸冤)에 이어 박근혜 정권의 신원까지 선거판 이슈로 등장한 것이다. 민주당처럼 국민의힘도 일단 선을 긋고는 있지만, 우병우의 출마도 그 혼자만의 기획은 아닐 것이다.

조국 전 민정수석은 1심에서 2년형을, 우병우 전 민정수석은 대법원에서 징역 1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공직 수행 중의 행위로 처벌을 받은 이들은 선출직이더라도 더 이상 공직에 나와서는 안 된다. 선거는 한풀이용 푸닥거리도 아니고, 죄를 씻어주는 세탁기도 아니다.

진중권 광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