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설가 후원 덕후 “먹고사는 걱정 대신 긴 이야기 써주세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김원일 소전문화재단 이사장이 서울 강남구에 있는 문학 전문 도서관 소전서림에서 책을 고르는 모습. 소전문화재단은 강원도에 예술인을 위한 무료 숙박 시설을 만들고 있다. 인문학 전공자와 소설가도 후원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원일 소전문화재단 이사장이 서울 강남구에 있는 문학 전문 도서관 소전서림에서 책을 고르는 모습. 소전문화재단은 강원도에 예술인을 위한 무료 숙박 시설을 만들고 있다. 인문학 전공자와 소설가도 후원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결국 영화든 드라마든 소설이든 삶을 이야기하는 거죠. 그 이야기가 모이면 역사가 되는 것이고요. 여러 종류의 예술 중에서 인간의 이야기를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무엇인지 꼽으라면, 저는 문학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김원일 소전문화재단 이사장(48)은 ‘문학 덕후’다. 2014년 스크린 골프 프랜차이즈인 골프존 운영에서 손을 떼고 7년간 칩거해 책만 읽었다. 골프존이 코스닥 시가총액 8위로 화려하게 주식시장에 데뷔한 2011년 그는 불과 36세였다.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 읽은 버트런드 러셀과 도스토옙스키, 위스망스가 그의 인생관을 바꿨다. 그는 여전히 골프존의 실소유주이지만, ‘소전문화재단 이사장’ 명함을 갖고 다닌다. 제2의 삶을 사는 그를 지난 7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소전서림에서 만났다.

‘흰 벽돌에 둘러싸인 책의 숲’이라는 뜻의 소전서림(素?書林)은 2020년 문을 연 문학 전문 도서관 겸 문화살롱이다. 연회비 10만원을 내고 회원으로 가입하면 하루 3시간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다. 전시·강연·공연·낭독회·원데이 클래스 등이 상시 열린다. 김 이사장이 칩거를 끝낸 뒤 가장 먼저 한 게 소전서림을 만드는 일이었다. 소전서림이 소장한 책 3만권 중 2만권이 문학 서적이다. 윌리엄 블레이크, 살바토르 달리 등 유명 화가의 삽화가 들어간 단테의 『신곡』, 파이프를 문 이상의 초상화가 그려진 문예지 ‘문학사상’ 1972년 창간호 등 희귀서적도 다수다.

독자 100명이 호평한 작품 매달 추려

회원제로 운영되는 문학 전문 도서관 ‘소전서림’의 내부. 문예지 ‘문학사상’ 창간호 등 희귀 서적도 다수 있다. [사진 소전서림]

회원제로 운영되는 문학 전문 도서관 ‘소전서림’의 내부. 문예지 ‘문학사상’ 창간호 등 희귀 서적도 다수 있다. [사진 소전서림]

여러 문학 장르 중 김 이사장이 관심을 기울이는 건 한국 장편 소설이다. 재단은 이와 관련한 두 가지 프로젝트를 운영 중이다.

먼저 ‘이달의 소설’ 프로젝트인데, 소전서림이 매달 출간되는 신작 장편 소설 중 한 권을 문학 마니아 독자 100명에게 보낸다. 독자는 소설을 읽고 미래에 고전이 될지 가늠하는 ‘고전 지수’ 점수를 부여한다. 최근에는 매 분기 평론가가 선정하는 ‘이 계절의 소설’ 프로젝트도 시작했다. 김 이사장은 “신간을 소개하고 좋은 책을 추리는 과정에서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좋은 책을 읽는 문화가 퍼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문학 전문 도서관 ‘소전서림’의 내부. 문예지 ‘문학사상’ 창간호 등 희귀서적도 다수 있다. [사진 소전서림]

회원제로 운영되는 문학 전문 도서관 ‘소전서림’의 내부. 문예지 ‘문학사상’ 창간호 등 희귀서적도 다수 있다. [사진 소전서림]

대상을 장편 소설로 한정한 이유는 뭘까. 김 이사장은 “가벼운 소설은 늘 잘 팔리기 때문에 독자에게 외면받는 장편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며 웃었다. 시대를 관통하는 고전,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은 그에 걸맞은 데서 나온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러면서 “인간을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길고 느린 호흡의 매체가 다양하게 나와야 한다. 큰 그릇에서만 나올 수 있는 큰 이야기가 있는데, 요즘은 이런 작품이 거의 나오지 않아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소전문화재단은 작가를 위한 ‘인문학 레지던시’를 강원도 홍천에 만들고 있다. 2025년 완공이 목표다. 상주 작가로 선정되면 독채 빌라에서 지내며 숙식과 생활비를 지원받는다. 김 이사장은 “그때그때 짧은 글을 팔아서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집필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장편 소설을 쓰기 부담스럽다는 작가가 많다”며 “이런 분들을 위해 숙식을 제공하고 생활비도 지원해 드릴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빌라 다섯 채 중 세 곳은 장편 소설 작가, 두 곳은 단편·시·예술서·인문서 등을 쓰는 작가에게 할당할 계획이다.

후원받은 이혁진 작가, 1년 만에 신작

장편 소설 후원 프로젝트는 구체적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1년 전 재단 후원을 받아 집필을 시작한 이혁진 작가의 『광인』(가제)이 오는 8월 민음사를 통해 출간된다. 위스키 제조업자인 여자 주인공과 음악 교사인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장편 소설이다. 김 이사장은 “우리 안에 있는 악을 세심하게 표현한 소설이며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는 작품”이라고 귀띔했다.

작가들을 위해 무료 숙소를 만들어주고, 인문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독지가이기도 한 김 이사장에게 인생의 또 다른 목표가 있을까. “저는 문학이 좋아서 후원을 합니다. 더 많은 사람이 좋은 책을 읽기 바라는 마음으로요. 심플하지만, 책 읽는 재미를 알리는 게 재단의 목표이자 제 인생 목표입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