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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존' 성공 뒤 책만 7년 읽었다…청담동에 지은 도서관 정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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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영화든 드라마든 소설이든 삶을 이야기하는 거죠. 그 이야기가 모이면 역사가 되는 것이고요. 여러 종류의 예술 중에서 인간의 이야기를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무엇인지 꼽으라면, 저는 문학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김원일 소전문화재단 이사장. 권혁재 기자

김원일 소전문화재단 이사장. 권혁재 기자

김원일 소전문화재단 이사장(48)은 '문학 덕후'다. 2014년 스크린골프 프랜차이즈 골프존 운영에서 손을 떼고 7년 동안 칩거하며 책만 읽었다. 2011년 골프존이 코스닥 시가총액 8위라는 성적으로 화려하게 주식 시장에 데뷔했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36세였다.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 읽은 버트런드 러셀과 도스토예프스키, 위스망스가 그의 인생을 바꿨다. 그는 여전히 골프존의 실소유주지만 '소전문화재단 이사장'이라 쓰여진 명함을 갖고 다닌다. 제 2의 삶을 살고 있는 김 이사장을 지난 7일 서울 강남구 소전서림에서 만났다.

'흰 벽돌에 둘러싸인 책의 숲'이라는 뜻의 소전서림은 2020년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문을 연 문학 전문 도서관 겸 문화살롱이다. 연회비 10만원을 내고 회원으로 가입하면 하루 3시간 도서관을 쓸 수 있다. 전시·강연·공연·낭독회·원데이클래스 등이 상시 열린다.

김 이사장이 대표직을 내려놓고 오랜 칩거를 끝낸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소전서림을 짓는 일이었다. 소전서림이 보유한 책 3만권 중 2만권이 문학 서적이다. 윌리엄 블레이크, 살바토르 달리 등 유명 화가의 삽화가 들어간 단테의 『신곡』, 파이프를 문 이상의 초상화가 그려진 문예지 '문학사상' 1972년 창간호 등 희귀 서적도 다수다.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회원제 도서관 '소전서림' 내부. 사진 소전서림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회원제 도서관 '소전서림' 내부. 사진 소전서림

여러 문학 장르 중에서도 최근 소전문화재단이 특히 관심을 기울이는 건 한국의 장편 소설이다. 최근 재단은 '이 계절의 소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계절의 소설'은 독자들이 매달 선정하는 '이달의 소설' 프로젝트와 매 분기 평론가들이 선정하는 '이 계절의 소설' 프로젝트로 나뉜다.

소전서림이 문학 마니아 독자 100명에게 매달 한 권씩 신작 장편소설을 발송하면 독자들은 작품을 읽고 그 작품이 미래에 고전이 될 것인지 가늠하는 '고전지수' 점수를 부여한다. 김 이사장은 "신간을 소개하고 좋은 책을 추리는 과정에서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좋은 책을 읽는 문화가 퍼지길 바란다"고 했다.

그 대상을 장편소설로 한정한 이유는 뭘까. 그는 "가벼운 소설은 늘 잘 팔리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외면 받는 장편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며 웃었다. 시대를 관통하는 고전,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은 그에 걸맞은 큰 그릇에서 나온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러면서 "인간에 대해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길고 느린 호흡의 매체도 다양하게 나와야 한다. 큰 그릇에서만 나올 수 있는 큰 이야기가 있는데, 요즘은 이런 작품이 거의 나오지 않아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회원제 도서관 '소전서림' 내부. 사진 소전서림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회원제 도서관 '소전서림' 내부. 사진 소전서림

강원도 홍천에는 작가들을 위한 '인문학 레지던시'를 만드는 중이다. 2025년 완공이 목표다. 상주 작가로 선정되면 독채 빌라에서 지내며 무료로 숙식과 생활비를 지원받는다. 김 이사장은 "그때 그때 짧은 글을 팔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집필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장편 소설을 쓰기가 부담스럽다는 작가들이 많다"며 "이런 분들을 위해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고 생활비도 지원해드릴 것"이라고 후원 취지를 설명했다. 레지던시 독채 빌라 다섯 채 중 세 곳은 장편 소설 작가, 두 곳은 단편·시·예술서·인문서 등을 쓰는 작가를 위해 할당한다는 계획이다.

그의 장편 소설 후원 프로젝트는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1년 전 재단의 후원을 받아 집필을 시작한 이혁진 작가의 『광인』(가제)이 오는 8월 민음사를 통해 출간된다. 위스키 제조업자인 여자 주인공과 음악 교사인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장편 소설이다. 김 이사장은 "우리 안에 있는 악을 세심하게 표현한 소설이며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작가들을 위해 공짜 숙소를 만들어주고, 인문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독지가로서의 인생 계획을 묻자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저는 문학이 좋아서 후원을 합니다. 더 많은 사람이 좋은 책을 읽길 바라는 마음으로요. 심플하지만, 책 읽는 재미를 알리는 것이 재단의 목표이자 제 인생의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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