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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밤꽃이 피었습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아카시나무 꽃향기가 이제는 밤꽃 향기로 바뀌었다. 우리 집에도 밤나무 한 그루가 있다. 창고를 지을 때 사라질 뻔했던 걸 남편이 가지는 좀 자르더라도 나무는 남겨 달라 하여 겨우 살아남았다. 동네분들 말씀으로는 우리 집 밤나무가 이 동네에서 가장 실하고 맛있어 모두 함께 이 밤을 나눠 먹었다고 한다. 비록 가지의 3분의 1일이 잘렸지만 아직도 이 밤나무는 6월 중순에 꽃을 피우고, 10월이면 갓난아이 주먹만한 초록 밤송이를 맺는다.

밤나무는 가로수 나무로도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밤송이 탓에 도시에선 보기 힘든 나무가 됐다. 여러 가닥으로 내려온 줄기에 작은 밤꽃이 줄줄이 매달려 있는 모습은 얼핏 거미줄로 뒤덮인 듯 보이기도 한다. 밤꽃 향기는 호불호가 명확해 싫다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의외의 반전이 있다.

행복한 가드닝

행복한 가드닝

영국 의사 에드워드 베치(1886∼1936)는 1920년대부터 38가지의 식물이 우리 정서에 미치는 치유 효과를 연구했다. 그중에 밤나무가 포함됐는데, 베치 박사는 이 밤나무가 ‘영혼의 어두운 밤’을 치유하는 효능이 있다고 봤다. 모든 노력에도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힘겨움이 찾아올 때, 이 밤나무가 치유의 힘을 준다는 것이다.

나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갑작스럽게 부모님을 잃은 탓인지 고질적으로 찾아오는 불안증이 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기지 않겠냐는 이 막연한 불안함은 매번 어지러운 꿈자리로도 이어진다. 이럴 때면 잠옷 차림으로라도 성큼 마당으로 나가 정원 일을 시작한다. 그렇게 한두 시간 몰두하다 보면 어느새 그 불안함이 사그라지는 걸 경험한다. 그게 베치 박사가 말하는 식물 치유 효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삶이 무겁게 나를 누를 때 식물에라도 기대보면 어떨까 싶다. 어쩌면 피어난 밤꽃이, 그 향기가 길고 어두운 터널 끝의 빛을 보여줄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 오가든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