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세컷칼럼

늙었다는 것은 살아남았다는 것

중앙일보

입력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므두셀라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아버지는 갓 태어난 아들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우윳빛 신생아 대신 쪼글쪼글 할아버지가 있지 않은가. 므두셀라는 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로, 무려 969년을 살았다고 한다. 70세 노인을 닮은 아들의 첫마디도 기막히다. “지팡이가 있으면 좋겠소.”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동명 원작 소설 앞 대목이다. 작가는 『위대한 개츠비』의 스콧 피츠제럴드. 노인으로 태어나 점점 젊어지더니 결국 어린 아기로 생을 마친다는 판타지다.

도전보다 생존이 일상이 된 오늘
나이보다 겉늙은 청춘의 자화상
정치권만 혼자 나이 거꾸로 먹어

 뜬금없이 ‘벤자민 버튼’을 꺼낸 건 올해 한국인 중위연령(출생연도별 가운데 나이)이 45.6세라는 지난 9일자 중앙일보 기사를 읽고서다. 1994년에는 28.8세였다. 한 세대 만에 16.8세가 높아졌다. 한국 사회가 그만큼 늙었다는, 아니 노인 기준에서 보면 그만큼 젊어졌다는 뜻이다. ‘벤자민 버튼’에 견주면 2023년의 신생아는 1994년에 비해 17세 나이로 태어나는 셈이다.

 노령화·고령화 추세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숫자로 확인하니 더욱 와닿는다. 이제 나이 마흔은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는 공자의 불혹(不惑)이 아니라 모든 게 불안하기만 한 청춘의 질풍노도에 가깝다. 나이를 먹는 건 누구에게나 버겁다. 젊은 층은 학업·취업·결혼 등을, 장년층은 양육·퇴직·노후 등을 걱정한다. 특히 20~30대의 고충이 심하다.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첫 세대의 탄생은 이제 상식이 아닌 상식이다. 평생 뼈 빠지게 일해도 형편이 나아질 것 같지 않은 무거운 공기가 지금 이 사회를 덮고 있다.

 그런 때문일까. 젊은이들의 마음도 점점 늙어가고 있다. 최근 20대 후배로부터 ‘늙었다는 것은 살아남았다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MZ세대가 밈(meme·인터넷 유행 인자)처럼 쓰고 있다고 한다. ‘강한 것이 살아남는 것’ ‘살아남은 것이 강한 것’이란 적자생존은 알겠지만 늙었다는 것이 곧 살아남았다니…. 노년의 반격인가.

 온라인 공간을 둘러보았다. 편의점 알바생의 하루 생존법부터 칼 든 강도를 제압한 72세 전직 복서의 무용담 소개까지 다양한 용례를 찾을 수 있었다. 요즘 청춘들은 음식·여행·쇼핑·게임 등의 소소한 경험에 ‘늙었다는 것은 살아남았다는 것’을 즐겨 붙였다. 굳이 해석하면 조로(早老) 사회의 그늘쯤 된다. 작은 행복을 좇는 ‘소확행’의 중늙은이 버전이자 끈질기게 버티는 ‘존버’의 에두른 표현 같았다. 도전·전진이 아닌 생존·멈춤에 가깝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양로원 장면에 벌새 이야기 나온다(※소설에는 없다). 1초에 심장이 1200번 뛰고 80번 날갯짓을 하는데, 만약 날개를 멈추면 10초도 안 돼 죽는다는 새다. 그 벌새의 노동에 우리 청춘들이 포획된 것은 아닌지 하는 기우마저 들었다.

 이 시대 젊은이를 애늙은이로 만든 책임은 당연히 기성세대에 있다. 한데 막상 정책 입안자들은 “나 몰라라”를 연발한다. 일례로 청춘의 미래를 담보로 잡은 국민연금조차 개혁할 의지, 혹은 역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양극화 해소, 계층 사다리 복원, 중산층 육성, 청년정치 진작, 약자와의 동행 등 각종 공언이 허언으로 들리는 이유다.

 현재 여의도·용산은 유치원보다 못한 수준이다. 꼬맹이 아이들도 서로 말을 섞고, 나만 봐 달라고 떼쓰지 않는다. 한국 정치권은 ‘벤자민 버튼’처럼 나이를 거꾸로 먹고 있는 게 확실하다. 다만 기력이 떨어지며 조용히 사라진 영화·소설 속 버튼과 달리 내년 총선까진 더욱 기운차게 으르렁거리며 싸울 것 같다.

 소설가 천명관의 단편 ‘퇴근’이 있다. 자식들은 양극화·계급화 함정에 매몰됐는데 늙은 부모들 또한 집에 못 가고 직장에 구속된 디스토피아를 그렸다. 미래 한국 사회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것’이란 노사연의 노래를 다음 세대들도 흥얼거릴 수 있을까.

글=박정호 수석논설위원  그림=김아영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