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창규의 시선

반도체 전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김창규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김창규 경제에디터

김창규 경제에디터

한·중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발단은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의 발언이다. 그는 지난 8일 “미국이 전력으로 중국을 압박하는 상황 속 일각에서 미국이 승리하고 중국이 패배할 것이라는 베팅을 하고 있다”며 “중국의 패배에 베팅하는 이들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고 말했다. 한국이 싱 대사를 초치해 엄중 경고하자 중국도 주중 한국대사를 ‘맞초치’했다.

갈등의 배경에는 반도체가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은 중국 반도체에 대해 고강도 규제를 하고 있다. 또 한국·대만·일본과 함께 중국을 배제한 반도체 공급망 협력 대화인 ‘칩4’를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중국은 이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갈수록 커지는 한·중 외교 마찰
배경은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
경제·외교·국방 걸린 전면 전쟁

1948년 미국 벨연구소의 윌리엄 쇼클리 등이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후 반도체의 씨앗이 뿌려지기 시작한다. 쇼클리는 1955년 캘리포니아 팔로알토 지역에 쇼클리반도체연구소를 세웠다. 하지만 몇년 뒤 고든 무어를 비롯한 연구원 8명은 쇼클리의 운영 방식에 불만을 품고 사표를 냈다. 이들이 항공기 회사를 운영하던 셔먼 페어차일드의 지원을 받아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세웠고 실리콘 트랜지스터를 최초로 상용화하는 데 성공했다. ‘실리콘 밸리’의 시작이었다.

이후 페어차일드 출신은 수십여 반도체 회사를 차렸다. 무어의 인텔을 비롯한 AMD·모토롤라 등이 설립됐다. 석유탐사 기계 팔던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는 AT&T로부터 특허를 사들여  반도체 시장에 진출한 뒤 정상에 올랐다. 이렇게 ‘종주국’ 미국에서 반도체는 화려하게 꽃을 피운다.

종주국의 우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미국 기업은 비용이 덜 들고 노조 문제가 없는 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기술 이전도 했다. 일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미국 기업이 두 차례의 오일쇼크로 주춤한 틈을 타 일본은 대규모 투자를 했다. 기술력을 앞세워 가격도 낮췄다. 순식간에 일본기업이 세계 반도체 시장을 장악했다. 1980년대 세계 10대 반도체 기업 중 일본전기(NEC)·도시바·히타치 등 6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NEC는 1985년부터 1990년까지 6년간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일본 기업이 한때 세계 반도체 시장의 80%를 점유할 정도였다.

시장이 공급 과잉에 빠지자 미국 반도체 기업은 다 무너진다며 아우성쳤다. 미국 정부는 칼을 빼들었다. 1985년 일본 반도체 기업의 덤핑 조사를 했다. 달러 강세를 막기 위해 엔화 가치 등을 조정하는 ‘플라자합의’로 일본을 옥좼다.

‘일본의 영광’도 시들기 시작했다. 각종 규제와 엔화 가치 상승으로 경쟁력이 약해진 일본 기업은 상위그룹에서 밀려났다. 2000년대 중반 반도체 세계 10위 안에서 일본 기업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시장을 무시한 기술 제일주의 탓도 컸다. 일본 기업이 불황에 겁먹고 투자를 두려워할 때 한국 기업은 강력한 오너십을 앞세워 과감한 투자를 했다. 결국 메모리 분야 1위로 올라섰다.

대만은 다른 전략을 택했다. 메모리 분야는 포화 상태이니 위탁생산 방식을 택했다. 1987년 파운드리업체 TSMC를 설립해 1위를 질주하고 있다. 후발주자인 중국도 2014년 대표기업을 키우고 2025년엔 자급률을 70%로 끌어올리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6월 블룸버그가 최근 1년간 가장 빠르게 성장한 반도체 기업 20곳을 발표했는데 19곳이 중국 기업이었다. ‘반도체 굴기’에 긴장한 미국은 중국 견제에 나섰다. 2020년 미국 기술을 이용한 제품의 중국 수출을 막았으며 지난해에는 ‘반도체지원법’을 통해 미국 보조금을 받는 기업의 중국 내 투자 확대를 제한했다.

반도체 시장은 총·칼 없는 전쟁의 역사와도 같다. 다른 산업과 달리 승자가 수시로 바뀐다. 반도체 사이클의 어려운 시기에 발을 잘못 디디면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만큼 위험하다. 여기에 세계 각국 정부가 사생결단의 자세로 달려든다. 반도체는 단순한 비즈니스가 아니란 뜻이다. 반도체는 안보다. 반도체는 국방과 핵심 기반 설비의 필수 요소다. 안정적인 반도체망을 확보하지 못하면 나라건, 기업이건 기술적 질식 상태에 빠진다. 그러니 한때 해외 생산기지를 앞다퉈 건설했던 미국이 자국 내로 반도체 생태계를 유치하려 한다. 산업질서도 다시 만들려고 한다. 경제에 외교·안보까지 더해지니 기업 입장에서는 셈법이 더욱 어려워졌다.

미·중 싸움에서 한국은 샌드위치와 같다. 수출로 먹고 사는 한국 입장에선 어느 한쪽 편을 들어주기도 어렵다. 단순히 ‘세계 최고의 기술력’만 외치며 기업에만 기댈 일이 아니다. 기업과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한국 반도체의 미래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