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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해 봐도 이 방법" 정부대책에 분통…'빌라왕' 피해자 뭉쳤다

중앙일보

입력

지난 9일 화성시 반송동의 한 상가건물 사무실에서 탄탄주택협동조합에 가입한 전세 사기 피해자 서모(28)씨가 문영록 한국사회주택협회 상임이사와 공인중개사에게 계약 내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손성배 기자

지난 9일 화성시 반송동의 한 상가건물 사무실에서 탄탄주택협동조합에 가입한 전세 사기 피해자 서모(28)씨가 문영록 한국사회주택협회 상임이사와 공인중개사에게 계약 내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손성배 기자

경기 화성시 동탄신도시에서 대규모 전세 사기 사건을 벌인 임대인 등이 검찰에 송치된 지난 9일, 이들로부터 피해를 당한 일부 임차인들은 ‘탄탄주택협동조합(탄탄하우징쿱, 이하 조합)’과 새로 임대차 계약을 맺었다. 정부 대책에 답답함을 느낀 전세 사기 피해자들이 일종의 ‘자력 구제’ 실험을 위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조합은 전세 사기로 흔들리는 피해자의 집도 삶도 다시 ‘탄탄하게’ 가꿔 나가자는 취지로 설립됐다. 사단법인 한국사회주택협회가 설립 과정을 주도했다. 최우선 목표는 보증금도 못 받고 원치 않는 집까지 떠안아야 하는 전세 사기 피해자의 회복과 자립이다.

이를 위해 조합은 가입 의향을 밝힌 피해자들을 대신해 현재 거주하는 오피스텔의 소유권을 기존 임대인으로부터 넘겨받고, 주택 인수 취·등록 비용과 재산세 등도 책임지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소유권을 넘겨받은 뒤엔 각 호실의 매매 시세 90% 수준으로 보증금을 정해 피해자들과 다시 계약을 맺고, 10%는 피해자들이 조합에 출자금으로 납부한다. 구상대로라면, 피해자들은 조합과의 새 임대차 계약을 통해 당장의 주거 불안을 해소할 수 있다. 동시에 조합은 향후 반전세 계약을 희망하는 새 임차인을 구해 조합원들의 보증금을 순차적으로 반환하고, 월세 수익을 모아 배당도 하겠다는 계획이다.

“소유권 이전은 사기꾼만 이득…손해 봐도 조합 가입”

조합 가입 대상은 전세 사기 혐의로 구속된 임대인 박모·장모씨 부부(268채 소유) 및 지모·양모(구속)씨 부부(44채 소유)와 임대차 계약을 맺은 피해자들로, 현재까지 조합 가입 신청서를 낸 피해자는 20명이다. 지난 9일 가장 먼저 계약서에 서명한 피해자는 4년차 회사원인 서모(28)씨였다. 직장까지 걸어갈 수 있는 지역에 자취방을 찾던 서씨는 구속된 장씨와 지난해 4월 25일 화성시 반송동의 한 오피스텔의 전세 계약을 맺었다. 전세 보증금은 1억3000만원, 계약 기간은 1년이었다. 당시 집주인 장씨 대신 동탄의 한 부동산중개업소 소속 공인중개사 이모씨(구속)가 대리인으로 나왔다고 한다.

서씨는 “사기당한 오피스텔 소유권을 이전받으면 보증금을 떼먹으려고 작정한 집주인 좋은 일만 해주는 꼴 아닌가”라며 “일부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조합에 가입하면 보증금의 일부는 확실히 반환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가입하게 됐다”고 말했다.

경기남부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는 지난 9일 사기 혐의로 동탄 오피스텔 임대인 부부와 공인중개사 부부 등 6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268채 임대인 장모(오른쪽)씨가 경찰 호송차에 올라타있는 모습. 손성배 기자

경기남부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는 지난 9일 사기 혐의로 동탄 오피스텔 임대인 부부와 공인중개사 부부 등 6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268채 임대인 장모(오른쪽)씨가 경찰 호송차에 올라타있는 모습. 손성배 기자

다른 피해자들의 상황도 비슷하다. 지난 4월부터 “기존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다. 소유권 이전 절차를 밟으라”는 박씨 부부의 일방통보에 속앓이만 하고 있다. 또한 지씨 부부는 임차인들에게 별다른 통지 없이 지난 2월 수원회생법원에 파산을 신청해 피해자들에게 더 큰 배신감을 안겼다. 이들 임대인 부부 사건을 수사한 경찰이 집계한 전세 사기 피해 금액은 각각 190억여원, 30억여원에 달한다.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에서 발생한 이른바 ‘빌라왕’과 ‘빌라의신’, ‘2400조직’ 등의 전세 사기 사건을 잇는 대규모 피해였다.

피해자들 “정부 대책, 와 닿는 것 없다”

정부는 지난 2월 전세 사기 예방 및 피해 지원방안을 발표했고, 지난 1일 전세 사기피해지원위원회를 발족해 법원 등에 경·공매 유예 및 정지 등 긴급 협조 요청을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전세 사기 피해자들은 피해자들은 “이 중 와 닿는 대책은 하나도 없었다”고 불만을 터트리고 있다. 조합에 가입한 나모(30)씨는 “전세 보증금이 매매가보다 높은 역전세 물건이 대부분이라 경매에 넘어가도 보증금을 지킬 수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다”며 “게다가 화성 동탄 오피스텔 전세 사기 피해자들은 정부 지원책 중 경매·소송 비용 지원 정도만 받을 수 있다. 정부 대책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 조합에 가입하기로 했다”고 했다.

나씨는 임대인 장씨 소유의 반송동 오피스텔을 2021년 7월 1억5500만원에 1년 만기로 전세 계약했고, 지난해 7월 주택임대차보호법상 증액 상한선인 5%(775만원)를 더해 보증금 1억6275만원에 갱신 계약했다. 전세 사기 임대인이 보증금을 반환할 의향이 없으면서도 법적으로 가능한 최대한도 만큼 보증금을 높여 재계약을 하게 한 것이다.

경기남부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는 지난 9일 사기 혐의로 동탄 오피스텔 임대인 부부와 공인중개사 부부 등 6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44채 임대인 지모(불구속)씨의 남편인 양모씨가 수원남부경찰서를 나서는 모습. 손성배 기자

경기남부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는 지난 9일 사기 혐의로 동탄 오피스텔 임대인 부부와 공인중개사 부부 등 6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44채 임대인 지모(불구속)씨의 남편인 양모씨가 수원남부경찰서를 나서는 모습. 손성배 기자

나씨와 조합은 앞선 보증금의 90%에 해당하는 1억3275만원에 새 임대차 계약을 맺었다. 조합 탈퇴 시 반환되는 출자금은 1475만원이다. 새 보증금과 출자금을 합친 1억4750만원이 기존 보증금보다 1525만원 적지만, 나씨는 “일정 부분 손해를 보더라도 이 방법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조합에 따르면, 나씨처럼 일부 손해를 보더라도 보증금을 회수할 가능성은 더 높다고 보고 가입 문의를 하는 피해자들이 많다고 한다.

기대만큼 우려도…“가입문 넓히고 금융권 후원 요청도”

다만, 아직은 첫걸음을 디뎠을 뿐이다. 전세 사기 피해자들이 모여 협동조합을 이루고, 이를 통해 피해 복구까지 이어지는 방식의 ‘자력 구제’를 시도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참고할 만한 성공 사례가 없다. 기대만큼 우려도 크며, 실제 조합이 계획대로 굴러가기 위해선 풀어내야 할 과제가 많다.

우선은 조합 규모를 키워야 한다. 조합의 최우선 목표는 피해자들의 보증금 반환이다. 이를 당장 실현하기 위해 1년간 순차적으로 새로운 세입자를 반전세나 월세로 받아 수익을 창출하는 방식을 생각해냈지만, 조합원 수가 적으면 월세 수익도 줄고 계획대로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게 된다. 또한 반전세 계약을 원하는 신규 세입자를 구하지 못하게 되는 것도 걱정거리다.

조합 측은 조합 가입의 문을 넓혀 사람을 최대한 모으고, 동시에 금융권 등의 지원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충당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김수동 탄탄주택협동조합 이사장은 “전세 사기 피해자 지원 특별법을 통해 보상을 받는 것보다 조합에 가입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보상 범위가 넓고, 빠르게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대안"이라며 "이미 임대인으로부터 소유권을 이전받은 피해자도 조합에 소유권을 넘기고 새로 임대차 계약을 하면 가입할 수 있다. 피해자들의 보증금 반환과 치유를 위해 금융권에 후원도 요청하고 있다”고 했다. 한 피해자는 “또다시 보증금을 못 돌려받는 아픔이 재현될까 우려되기도 하지만, 현재는 억지로 소유권을 떠안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다. 조합에 기대를 걸어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세 사기 피의자 6명 송치… 명품 착용에 피해자 분노

한편 경기남부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는 9일 사기 등 혐의로 장씨 부부와 양씨 부부, 이들의 임대차 계약을 대리한 공인중개사 이씨 부부 등 6명(5명 구속, 1명 불구속)을 검찰에 송치했다. 이날 오전 10시쯤 수원남부경찰서를 나서던 피의자 중 일부가 명품 의류를 착용한 사실이 알려지자 일부 피해자들은 “보증금 돌려줄 돈은 없고 명품 사 입을 돈은 있느냐”며 분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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