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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심포니 50년만의 여성 첼로 단원 이정현 “나 말고 악단 위해 연주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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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오디션을 통해 미국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이 된 첼리스트 이정현. 보스턴 심포니가 50년 만에 뽑은 여성 첼로 단원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 2월 오디션을 통해 미국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이 된 첼리스트 이정현. 보스턴 심포니가 50년 만에 뽑은 여성 첼로 단원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보스턴 심포니 홀을 처음 본 순간 ‘아 여기서 연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뭔가 따뜻한 분위기에 에너지가 느껴져서 오디션 보는 사람을 응원해주는 것 같았어요.”

1973년 이후 첫 여성첼로 단원, 최초의 아시아 여성 단원 #10세 때 커티스 음악원 입학, 2018 윤이상 콩쿠르 우승 #솔로·실내악 이어 오케스트라까지 “풍부한 경험이 밑거름” #8월부터 보스턴 심포니 합류, 유럽 투어에도 참가

지난 2월 오디션에 통과해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이 된 첼리스트 이정현(32)의 말이다. 이정현은 지난해 여름 은퇴한 여성 첼로 단원 마사 밥코크의 후임으로, 보스턴 심포니가 50년 만에 뽑은 여성 첼로 단원이자, 최초의 아시아 여성 첼로 단원이다.

열 살 때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원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한 이정현은 열세 살에 크리스토프 에셴바흐가 지휘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뮤직 샤펠에서 게리 호프만에게 배웠고 줄리아드 음대 석사과정을 마쳤다. 보스턴 심포니 입단으로  솔로이스트와 실내악에 이어 오케스트라까지 넘나드는 전방위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에게 2월 오디션 뒷얘기를 들었다. 오디션은 보스턴 심포니홀에서 네 차례에 걸쳐 열렸다. 1차는 사전 제출한 연주 영상과 서류심사, 2차는 슈만 협주곡과 드뷔시 ‘바다’, 브람스 교향곡 2·3번,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브루크너 교향곡 7번 등의 엑섭(excerpt, 발췌 악보)을 8~10명의 그룹으로 나누어 연주하는 것이었다. 둘째 날 3차 오디션은 혼자 연주하는 슈만 협주곡, 바로 이어진 4차 오디션에서는 막을 치운 상태에서 슈베르트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연주한 다음 음악감독 안드리스 넬손스의 지휘에 맞춰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을 연주하는 것이었다.

“넬손스 선생님은 영상에서 보던 것과는 아주 달랐어요. 캐주얼한 복장이었는데, 지독하게 느린 템포로 지휘했죠. 오디션 참가자들의 실력을 보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어요. 뒷방에서 결과를 기다리는데 오케스트라 매니저가 합격했다고 알려주더군요. 밤 9시 넘어서 단원들과 인사를 했어요.”

2018년 윤이상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정현은 다양한 소리와 비브라토를 통해 국악의 소리와 한국의 정서를 표현하는 데 관심이 많다. 2021년 6월 푸가 리베라 레이블에서 발매한 데뷔 앨범에 북한 작곡가 백고산의 ‘아리랑 변주곡’을 싣기도 했다.

지난해부터 파리의 현악 4중주단 모나 콰르텟(The Quatour Mona)의 첼로 멤버로 활동 중이다. ‘모나’는 ‘마돈나(프리마 돈나, 주역 여가수)’를 줄인 이름이라고 한다. 라트비아·프랑스·미국·한국의 네 현악 주자가 서로 다른 문화를 나누며 음악을 연주하자는 취지다. 베토벤·브람스뿐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요하나 뮐러나 프랑스의 타유페르 같이 여성 작곡가들의 작품을 해석했다.

이정현은 "틀리지 않는 연주를 보여주려 하기보다 연주곡 전체의 흐름 안에 들어맞을 수 있는 연주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오디션에 임했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정현은 "틀리지 않는 연주를 보여주려 하기보다 연주곡 전체의 흐름 안에 들어맞을 수 있는 연주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오디션에 임했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보스턴 심포니 오디션에 참가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지난해 말 연주 일정 때문에 통영에 머무르고 있을 때라고 했다.

“언젠가는 오케스트라 경험을 하겠지 하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어요. 반복되는 생활에서 벗어나 내 음악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느꼈죠. 그때 가장 가까운 시기에 오디션이 예정됐던 오케스트라가 보스턴 심포니였습니다.”

이정현은 오디션을 준비하며 뜻밖에도 오디션 엑섭의 원곡인 교향곡과 관현악곡을 사랑하게 됐다고 했다. 곡이 워낙 좋아서 역사와 맥락 공부가 흥미로웠고 긴 협주곡이 아닌 엑섭이라 음악을 즐기게 됐다. 음반도 찾아 듣고 지휘자 영상도 찾아보면서 보스턴 심포니에 푹 빠졌다.

“대개 연주가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게만 하려 하면 절대 좋은 연주가 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단원들 중엔 그 곡을 100번 넘게 연주하신 분들도 계시거든요. 그분들도 좋은 동료를 찾고 싶어 할 겁니다. 그렇다면 단지 틀리지 않기 위한 연주가 아니라 와 닿는 연주가 되어야 하고, 전체의 흐름이나 유기적인 움직임을 파악해 음악 안에 들어가 연주하는 게 중요한 거죠.”

이정현은 8월 탱글우드 음악제에서 넬손스가 지휘하는 보스턴 심포니의 단원으로 연주를 시작한다. 8~9월에는 런던·루체른·함부르크·쾰른·베를린·파리를 도는 보스턴 심포니의 유럽 투어에 참여한다. 6개월~1년 걸리는 트라이얼(수습) 기간을 통과하면 종신 단원 자격이 주어진다.

“그저 열심히 할 뿐이죠. 실내악 같이 하자고 제의하는 단원분들도 계시고요. 8월부터 지켜보겠다며, 지각하지 말고 준비 잘하라고 조언해주세요. 궁금한 점을 질문하면 다 도와주시려고 하고요. 저만 잘하면 돼요.”

보스턴 심포니 합류 전 이정현은 데이비드 이 지휘와 미하일 플레트뇨프 지휘 서울시향 연주회에 첼로 객원 수석으로 참여한다. 커티스 음악원 교장 로베르토 디아즈, 바이올리니스트 엘리사 리 콜조넨과 미국 투어를 한 다음 7월에는 평창대관령음악제에 참가한다.

요즘은 첼로 백과사전을 편찬 중이라고 했다. 곡 설명은 물론 연습 방법, 기교, 음악적으로 생각하는 법, 알아두면 좋은 지식 등을 촘촘하게 채운 책이다. 오케스트라 단원 지망생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맥락을 두루 볼 수 있도록 협주곡·실내악 등 다양하게 경험하는 게 좋습니다. 외국 단원들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키우면 즐겁게 음악을 할 수 있겠고요. 호기심과 궁금증도 필수죠. 어쨌든 결국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류태형 객원기자·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ryu.tae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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