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K성악 상품성 세계 시장에 알릴 행정·기획 고민 할 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43호 20면

김태한 우승으로 본 한국 성악

2023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한 바리톤 김태한이 결선 무대에서 열창하고 있다. [사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2023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한 바리톤 김태한이 결선 무대에서 열창하고 있다. [사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한국에서 클래식을 전공한 남성 성악도가 성공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부를 좇는다면 크로스오버나 트로트 경연에 나가 입상하고 콘서트와 행사 시장을 석권할 수 있다. 명예를 따진다면 국제 콩쿠르에 나가 우승해 존재를 알리고 해외 오페라 극장의 밑바닥부터 닦으며 이름값을 올린다.

우리 현실에선 둘 다 누리긴 어렵다. 조수미 급의 스타가 되어야 금전과 명성이 함께하지만, 남녀 통틀어 조수미 같은 성악 셀럽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정통 성악으로 유럽 중심부와 미국에서 인정을 받아도, 국내에선 시장 규모와 관객의 기호 탓에 순수 클래식으론 부를 축적할 수 없다. 성악도에겐 돈이냐 명예냐의 기로만 있다.

조수미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려야”

심사위원 조수미, 결선 진출 동료 성악가 다니엘권(왼쪽), 정인호(오른쪽)와 함께. [연합뉴스]

심사위원 조수미, 결선 진출 동료 성악가 다니엘권(왼쪽), 정인호(오른쪽)와 함께. [연합뉴스]

바리톤 김태한의 2023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은 열악한 국내 성악 시장을 들썩이게 한 경사임에 분명하다. 김태한의 우승을 뒷받침한 응원군은 스승 나건용과 연수 기회를 마련한 국립오페라단, 공연 기회를 제공한 금호문화재단, 장학금을 희사한 신한은행 등을 들 수 있겠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성악 분야의 콩쿠르 우승은 루키의 가능성을 평가한 심사위원단의 총의에 불과하다. 미래 인재를 ‘제2의 조수미’로 만들고, 김태한 앞에 놓인 현실과 해결안을 살피는 게 지금 한국 클래식 생태계의 과제다.

우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성악 부문 우승 신화를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쇼팽 피아노 콩쿠르, 차이콥스키 콩쿠르와 함께 흔히 ‘세계 3대 국제 음악 콩쿠르’로 분류되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1937년  ‘바이올린의 전설’ 외젠 이자이(1858-1931)를 추모하는 취지의 ‘이자이 콩쿠르’로 시작됐다. 이듬해 피아노 부문이 추가됐고, 1951년부터 후원자인 벨기에 왕실을 부각하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한참 후인 1988년 성악, 2017년 첼로가 편입되어 4개 부문이 매년 순환제로 열리고 있다.

바이올린, 피아노를 제외한 부문에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동급의 위상을 갖췄는가는 냉정히 따져볼 문제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레오니드 코간, 바딤 레핀, 임지영 등 바이올린 우승자는 대중에게 친숙한 이름이 됐다. 피아노에선 에밀 길렐스, 레온 플라이셔,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등이 우승했고, 1991년 백혜선, 2016년 한지호의 4위가 한국인 최고 성적이다. 역사적으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권위는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분담해 온 것이다.

성악 부문은 어떨까. 소프라노 아가 윈스카·이보나 소보트카, 콘트랄토 마리 니콜 르미외, 테너 서볼치 브리크너, 바리톤 스티븐 솔터스·사무엘 하셀호른, 베이스 티에리 펠릭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배출한 우승자들이다. 어지간한 클래식 애호가들에게도 낯선 이름들이다. 한국인으로는 2011년 소프라노 홍혜란, 2014년 소프라노 황수미가 우승했지만, 이름만 불러도 그의 성부(聲部)가 자동으로 따라붙는 스타 탄생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선 아직 나오지 않았다.

김태한은 “수퍼스타가 되고 싶다”고 했고, 조수미는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려야 해”라고 자만을 경계했다. 경험에서 우러난 격려이자 채찍질이다. 성악 세계에서 ‘수퍼스타’의 활동 반경은 오페라를 뜻하고, 김태한의 앞날도 오페라의 성과로 판가름날 것이다. 그런데 세계 유수의 오페라 극장들은 성악 콩쿠르 결과를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세계적 오페라 극장의 캐스팅 디렉터나 극장장이 막대한 자금이 들어간 전막 오페라의 성패를 좌우할 핵심 배역에 갓 배출된 콩쿠르 우승자나 20대 신인을 중용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보다 권위 있는 차이콥스키 콩쿠르 성악 부문, 도밍고 오페랄리아, BBC 카디프 싱어 오브 더 월드를 우승해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밀라노 라 스칼라, 뮌헨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빈 슈타츠오퍼, 런던 로열 오페라, 파리 국립 오페라 급의 메이저 오페라 극장에 조역, 준주역으로 서기까지 보통 다섯 시즌이 걸린다는 게 상식이다. 그 사이 상품성과 실력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명함을 내밀 수 있다.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남성 성악 우승자 박종민, 2016년 오페랄리아 우승자 김건우를 비롯해, 2021년 BBC 카디프 싱어 오브 더 월드 우승자 김기훈이 체감하고 있는 세계 오페라의 주류 질서가 그렇다. 노르웨이 소냐 왕비 콩쿠르를 ‘세계 3대 성악 콩쿠르’로 꼽는 출처 불명의 우승자 꼬리표는 중요하지 않다. 오디션에서 보인 기량이 해당 극장장의 취향에 맞는지가 캐스팅을 좌우한다. 관객, 동료 가수의 인정은 물론, 극장 관계자들의 중지가 모일 때 비로소 ‘오페라 스타’가 탄생한다.

김태한, 아리아서 섬광 같은 가능성 보여

지난 6일 시상식에서 우승 상장을 받은 김태한. [연합뉴스]

지난 6일 시상식에서 우승 상장을 받은 김태한. [연합뉴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역대 우승자의 오페라 활동이 여타 대회 우승자에 비해 다소 취약하다는 점도 김태한이 참고할 만하다. 2004년 우승자 소보트카는 베를린 코미세 오퍼 주역이 정점이었고 2008년 우승자 브리크너는 만하임오페라와 빈 폭스오퍼에 머물렀다. 2018년 우승자 하셀호른은 내년 베를린 슈타츠오퍼 ‘세비야의 이발사’의 피가로 역이 시험대가 될 것이다. 2011년 우승자 홍혜란과 2014년 우승자 황수미는 국내로 거점을 옮겨 전문 연주가와 교수직을 겸하고 있다.

김태한은 올해 9월부터 베를린 슈타츠오퍼 국제 오페라 스튜디오 멤버로 활동할 계획이다. 이곳의 멤버는 계약 기간 2년 동안 베를린 슈타츠오퍼 전막의 단역을 맡게 된다. 2023~24 시즌 베를린 슈타츠오퍼가 김태한에게 배정한 단역은 ‘맥베스’ 살인자·유령, ‘불면증’ 6중창, ‘마술피리’ 갑옷 기사 2, ‘라 트라비아타’ 도비니 후작, ‘나비부인’ 야마도리 공, ‘피가로의 결혼’ 안토니오 등이다.

오페라 시장에서의 입지를 고려할 때 김태한에게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보다 베를린 슈타츠오퍼 신인 과정 이후의 행선지가 더 중요하다. 종전 우승자들의 행적을 종합하면, 독일·프랑스·이탈리아 극장 중 한 곳의 앙상블에 들어갈지, 프리랜서로 성악 인생을 개척할지 결정해야 한다.

김태한의 5년 후 궤적을 그려 본다면, 일단 조수미의 전막 데뷔 과정을 참고할 만하다. 조수미가 1986년 오페라 ‘리골레토’의 ‘질다’로 데뷔한 곳은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베르디 극장이었다. 이탈리아 약 60여개 오페라 하우스 가운데 상위 13개 극장에 부여되는 이탈리아 국립 오페라 교향악 재단 연합회(ANFOLS) ‘세리에 A’ 등급의 위상이다. 카라얀이 조수미를 ‘신이 내린 목소리’로 칭송한 건 트리에스테 극장에서의 성과 덕분에 이듬해 자리가 마련됐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오디션에서였다. 김태한이 이번 콩쿠르에서 보인 자질을 갈고 닦아 베를린 슈타츠오퍼 견습 과정이 순조롭게 끝난다면, 이탈리아 세리아 A급 극장 주역급도 노릴 만하다.

이제부터 김태한의 단기 과제는 유수의 오페라 극장이 원하는 이상적인 스타상에 얼마만큼 자신을 맞추느냐다. 오페라 극장이 가수에게 원하는 건 전막을 끌고 갈 카리스마인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김태한이 전한 미덕은 예술 가곡을 전하는 전아한 태도와 오페라 아리아에서 섬광처럼 보인 가능성이다. 코른골트 ‘나의 갈망이여, 나의 망상이여’를 경연에서 부르는 것과, 실제 오페라 전막 ‘죽음의 도시’을 끌고 가는 카리스마는 별개다. 불펜 피칭에서 강속구를 던지는 것과 실제 경기에서 타자를 요리하는 능력이 일치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소프라노 임선혜·박혜상처럼 콩쿠르에 상위 입상하지 않아도 오페라 극장의 특성, 시대가 원하는 캐릭터를 포용해 독특한 아우라를 창조한 선배들의 성과도 참조할 만하다.

이젠 지속적으로 한국 성악가의 잠재력을 국제 시장에 상품으로 펼칠 행정과 기획을 고민할 때다. 먼저, 성악 인재가 어지간한 해외 스케줄을 포기해서라도 내한을 결정할 양질의 전막 오페라 제작과 그에 상응하는 개런티 보장이 필요하다. 국립오페라단, 예술의전당 제작 오페라가 앞다퉈 수작을 올리면 서울시 오페라단, 대구 오페라하우스가 연쇄반응 하게 되어 있다. 다만, 작품당 2회 출연 급여로는 한 달의 연습 과정을 감내하기 어렵다. 공연 횟수를 늘리거나, 회당 개런티를 인상하는 재정적 배려가 오페라 발전과 직결되어 있다.

2025년말 완공 목표인 부산 오페라하우스, 2027년 개관 추진 중인 아트센터 인천 오페라하우스가 경쟁하는 마당이 갖춰지면 K클래식은 오페라에서 절정을 맛볼 것으로 예상된다. ‘아시아 최초의 남성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자’의 명예를 오페라 극장에서 어떻게 금전으로 연결할 것인가에 한국 오페라 극장 문화의 성숙이 달렸다.

마지막으로 국내 오케스트라가 성악 인재들과 함께할 기회를 되도록 많이 제공하면 이들이 콩쿠르에 나가 결승 무대에서 보일 퍼포먼스의 수준이 김태한처럼 최상을 유지할 것이다. 국립심포니를 비롯해 극예술 반주 경험이 풍부한 악단이 젊은 성악도들에게 오케스트라를 배경으로 노래할 기회를 제공하는 건 돈보다 의지의 문제다.

한정호 공연 평론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