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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침 막으려 첫 북파한 부대원, 240명 중 23명만 생환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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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3호 05면

한국전쟁 정전 70년 기획

호림부대는 1949년 7~8월 38선 이북에서 임무를 수행한 뒤 9월부터 지리산·보현산·팔공산 등에서 공비토벌 작전에 참여했다.

호림부대는 1949년 7~8월 38선 이북에서 임무를 수행한 뒤 9월부터 지리산·보현산·팔공산 등에서 공비토벌 작전에 참여했다.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고만 알려주시게.”

93세 노인은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보다, 그것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하다”며 “그러니 내 이름 석 자를 제대로 알릴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휠체어에 앉은 송이남(가명)옹은 그러면서 기자의 손을 더듬더듬 잡았다. 하지만 74년 전을 떠올리자 범처럼 날랬던 북파 부대원이 돼 있었다. 지난 8일 경기도 파주의 한 카페에서 송옹을 만났다.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북파 부대에 대해 2시간 넘게 이야기했다.

“소속은 육군정보국 호림(虎林)유격부대 2대대. 부대라지만 계급도, 군번도 없었소. 북한에 침투한다는 특수임무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오.”

송옹에 따르면, 1949년 2월 대통령령 37호에 따라 육군 수색(水色)학교가 설립됐다. 이후 호림유격대부대로 이름을 바꾼다. 이북에서 내려온 서북청년단원들이 주축이었다. ‘호림’은 평안도 사람들의 용맹하고 성급한 성격을 일컫는 ‘맹호출림(猛虎出林)’에서 따왔다. 당시 북한은 평양 교외에 ‘강동정치학원’을 만들어 남로당 출신 월북자를 훈련한 뒤 설악산·태백산·오대산·보현산·팔공산 루트로 남파시켰다. 호림부대는 이에 대응하면서 소련의 군수 장비를 받고 있었던 북한의 남침을 저지, 지연시키기 위한 특수임무를 부여받았다고 송옹은 전했다. 당시 한국 군의 누군가는 6·25가 터지기 1년여 전부터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읽고 저지 노력을 했다는 얘기다.

붙잡힌 대원들, 김일성 참관 속 처형돼

호림부대는 1949년 7~8월 38선 이북에서 임무를 수행한 뒤 9월부터 지리산·보현산·팔공산 등에서 공비토벌 작전에 참여했다.

호림부대는 1949년 7~8월 38선 이북에서 임무를 수행한 뒤 9월부터 지리산·보현산·팔공산 등에서 공비토벌 작전에 참여했다.

호림부대의 실체를 알리려는 호림안보협의회의 정규필 회장(예비역 대령)은 “대통령령 37호로 만들어진 부대였음에도 당시 이승만 정부는 실체를 부인했다”고 밝혔다. 송옹이 밝힌 실체 부인의 과정은 이렇다. 호림부대는 2, 3, 5, 6대대로 이뤄졌다. 1949년 6월 29일, 5대대와 6대대 240명이 먼저 북으로 올라갔다. 5대대와 6대대는 북에서 유격전을 벌이고, 소련 군사 장비를 실어나르는 원산~양덕 간 철로의 터널과 교량을 폭파하는 게 주요 임무였다. 두 대대는 38선을 뚫은 뒤 설악산 봉정암에서 헤어졌다. 이들은 설악산에 손톱과 발톱을 깎아 묻은 뒤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5대대는 동쪽으로 틀어 설악산 대청봉~진부령을 넘어 7월 17일 내금강 국사봉에 이르렀고, 6대대는 중부로 방향을 잡고 7월 7일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서화리 가마골에 도착했다.

하지만 작전의 결과는 처참했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북한군에 의해 궤멸당하고 만 것이다. 호림안보협의회에 따르면, 240명 중 203명이 전사했고, 14명이 포로로 잡혔다. 생환자는 23명에 불과했다. 북한은 생포 호림부대원이 44명이라고 밝혔다. 5대대, 6대대를 지원하기 위해 나선 3대대는 철수 명령을 받고 7월 14일 서울 용산 기지로 복귀했다.

송옹이 소속돼 있던 2대대는 1949년 7월 당시 어디에서 활동하고 있었을까. 송옹은 “우린 서쪽, 그러니까 서해안에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110여 명이 배 두 척에 나눠 타고 영종도·용유도·팔미도 등 인천 서쪽 해안에서 들락날락하며 혹시나 있을 북쪽의 탐지에 대비해 교란작전을 벌였다”고 밝혔다. 그러다가 2대대는 8월 초에 전초기지 격인 백령도에 들어갔다. “인민군 복장을 하고 일본군 99식 장총과 소련·체코에서 만든 소총, 북한 화폐를 소지했는데…아, 수류탄은 미제였지”라며 송옹은 당시를 떠올렸다. 이어 2대대는 황해도 월내도에 상륙했다. 송옹은 “청천강을 따라 묘향산까지 진출하면서 곳곳의 철도와 터널을 폭파하는 것이 작전 명령이었다”며 “월내도와 초도에서 정보 수집과 선전 선단 살포 등의 활동 중 육본의 철수 명령에 따라 8월 말 용산으로 복귀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두 명이 사망했다”고 덧붙였다.

생존한 두 명의 호림부대원 중 유일하게 북파 경력이 있는 송이남(가명)옹은 “정부 보상 등 대가를 바라며 인터뷰하는 것처럼 비치는 건 원치 않는다”며 정면 사진 촬영을 꺼렸다. 최영재 기자

생존한 두 명의 호림부대원 중 유일하게 북파 경력이 있는 송이남(가명)옹은 “정부 보상 등 대가를 바라며 인터뷰하는 것처럼 비치는 건 원치 않는다”며 정면 사진 촬영을 꺼렸다. 최영재 기자

5대대와 6대대에서 북한군에 생포된 호림부대원은 인민재판을 받았고, 김일성이 참관한 가운데 처형됐다고 한다. 1949년 9월 11일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인민재판 과정은 1990년과 2000년 국내에서 방송된 적이 있다. 이 자료에는 북한 측 검사가 “호림부대는 남한의 채병덕 참모총장 등 육군 수뇌부가 직접 조직한 특수부대”라고 말하기도 한다. 일부 호림부대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재판에 등장하는 이들이 호림부대원이 아니고 이미 처형된 뒤 등장한 가짜라고 했다. 송옹은 “당시 이승만 정부는 호림부대의 실체를 부인했다”며 “한국전쟁이 남침이 아니고 북침이라는 주장의 빌미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9연대인가, 용산에 우리 연대(당시 용산 주둔 부대는 17연대)가 있었는데 북에서 철수한 뒤 어느 날 우리를 줄 세우더라고요.”

이어진 송옹의 말은 이랬다. 연대의 상관이 호림부대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전역을 할 것인가를 물어봤다. 송옹은 고민을 하다가 제대를 택했다고 한다. 1949년 9월 말이었다. 이때 호림부대는 ‘육군 영등포학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하지만 송옹은 이듬해 한국전쟁이 터지고 얼마 뒤인 1950년 8월에 입대했다. 북한 인민군에 밀려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던 때였다. 송옹도 개전 초기에는 피란길에 올랐다. 6월 25일 서울, 6월 27일 안양 등 날짜와 지역을 대며 피란 과정을 상세히 말했다. 그는 피란 중 부산에서 다시 군인이 되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한 달 훈련을 받고 당시 일본에 주둔하던 미 7사단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다. 송옹은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1950년 10월 28일 함정에 몸을 싣고 북으로 향했다. 송옹은 “(원산 인근의) 이원은 상륙하기 아주 좋은 해안”이라며 “우리(미 7사단)는 (함경북도) 풍산·삼수·갑산을 지나 혜산진까지 진격했는데 나는 삼수까지만 갔고, 이후 중공군에 밀려 흥남에서 철수하면서 장진호를 서쪽에서 호위했다”고 전했다. 그는 당시 한국군 소속으로 미군에 파견된 상태였다. 소속이 중간에 바뀌긴 했지만, 송옹은 북파 특수공작 뿐 아니라 인천상륙작전, 원산상륙작전, 북진, 장진호전투 등 6·25의 주요 고비마다 현장에 있었다. 그의 행적이 곧 6·25 전사(戰史)인 것이다.

호림부대원 중 단 두 명만 살아있어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송옹의 이런 행적은 다른 호림부대원들도 겪었다. 일부 대원들은 북파 뒤 공비 토벌에 나섰다. 피아 양측에서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한국전쟁이 터진 뒤 송옹처럼 ‘현역’으로 수많은 전투에 나서기도 했다. 영등포학원으로 이름을 바꿨던 호림부대는 1950년 8월에 해체됐고, 부대원들은 제3사단 수색중대와 같은 사단 23연대 소속 중대로 흩어졌다. 그러니까 북파 유격전(혹은 게릴라전), 공비 토벌전, 정규전 세 가지를 모두 겪은 부대원도 있었다. 송성식 호림안보협의회 사업단장은 “호림부대원은 크게 세 번이나 사지(死地)에 나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생존자도 적다. 한때 860여 명에 달했던 부대원 중 현재 살아남은 이는 단 두 명이다. 송옹과 강모(92)옹이다. 이 두 명 중 송옹만 북파 경력이 있다. 결혼도 하기 전인 20세 전후에 활동한 이들이 많아 유족도 거의 없다. 이름을 바꾸고, 대원들도 흩어지면서 호림부대는 잊혔다. 정규필 회장은 “2004년 보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호림부대가 세간에 다시 알려진 것”이라고 말했다.

송옹은 두 차례 정부에 유공자 신청을 했다. 2019년 건은 기각됐고, 지난해 건은 계류 중이다. 정 회장은 “2019년 건은 국방부에서 대상이 안 된다고 했다”고 말했다. ‘특수임무수행자보상에관한 법률시행령’ 제2조에 따르면, 외국군에 소속되었거나 군 첩보부대의 창설 이전에 구성돼 유격전 등에 종사한 경우는 이를 제외한다고 명시돼 있다. 즉 육군 첩보부대(HID)는 육군본부 정보국 공작과에서 독립해 1951년 3월 발족했는데, 한국전쟁 이전의 특수 임무는 보상 대상이 아니란 것이다. 송옹은 ‘6·25전쟁 전후 적 지역에서 활동한 비정규군 공로자 포상에 관한 법률과 그 시행령’에 따라 지난해 다시 신청을 했다. 정 회장은 “국방부에서 5월 초까지 답변을 준다고 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다”고 밝혔다.

송옹을 만나기까지 힘든 설득이 필요했다. “내가 지금 언론 인터뷰를 하면 꼭 무슨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처럼 비쳐질텐데, 나는 그런게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약속 장소에 나타나서도 그는 한동안 증언을 주저했다.

전쟁은 숱한 사연을 남기고 그 사연의 대부분은 비극이다. 기억하는 사연보다 기록 한 줄 남기지 못하는 사연이 훨씬 많다. 호림부대도 그렇게 잊힌 것일까. 국립서울현충원에는 호림부대에 관한 내용이 있다. ‘유격부대 전적위령비’에는 ‘한국 초유의 유격전을 전개해 적의 군사 활동을 견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적혀 있다. 현충탑에는 위패도 봉안돼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광복절을 앞두고 이곳에서 ‘호림부대’를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있었으나 있지 않았던 것처럼 보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면서도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하는 부대. 송옹은 다시 기자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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