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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윤의 내 친구, 중국인] 중국에서 절대 성공할 수 없는 직업은?

중앙일보

입력

농담이 있다.

중국에서 절대로 성공 못 할 직업은?  
심리치료사.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스스로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 셔터스톡

사진 셔터스톡

2005년 세계 가치관 조사(world values survey)에서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은 믿을 만하다’라는 문항에 대해 한국인의 30.2%만이 ‘그렇다’고 응답했다. 이는 스웨덴(68.0%)과 같은 선진국들은 고사하고 중국(52.3%)이나 베트남(52.1%)보다도 낮은 수치다

필자가 (출처는 잊었지만) 자주 인용하는 내용이다. 이 내용을 소개하면, 듣는 이들이 깜짝 놀란다. 그리고 서로 신뢰를 못 하는 우리 사회에 대해서도 반성(?)을 하겠지만, ‘의심이 많다는 중국인들’보다도 낮다는 수치는 뒤통수를 때린다.

그런데 필자는 이 통계에 대해 조심스럽게 다른 각도로 점검하고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대로 믿기에는 석연치 않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늘 듣던 말이 있다. 바로 “중국인은 의심이 많다”다. 그런데 통계로는 우리가 그들보다도 사람들에 대해 의심이 많다고 하니 정말 뜻밖이다.

심지어 얼마 전 지인이 방송에서 들었다면서 “(코로나 시국을 겪고 나서도) 중국 최고 지도자에 대한 중국인들의 지지도가 거의 90%에 육박한다…. 이게 하버드 케네디 스쿨에서 조사한 통계다. 의외지만, 안 믿을 수가 없다고 진행자마저 부연 설명하더라…. 어떻게 생각하냐?”라고 물었다. 방송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고 말해줬는지는 모르지만, 그럴 수도 있겠는데 설문에 응한 중국인들이 어떤 이들인지, 어떤 방식으로 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하나 덧붙이면 중국 사람들의 설문지를 대하는 태도를 먼저 알아야 한다. 명백한 통계 숫자라 해도, 문화라는 필터로 걸러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세상에는 3가지 거짓말이 있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다. (<만들어진 진실>)

저자인 헥터 맥도널드는 한 마디 더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숫자들이 무엇을 뜻하는 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숫자를 고문하라, 원하는 내용은 뭐든 불 것이다. (미국의 평론가 그레그 이스터부룩)

통계 조작이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의 오판을 불렀다는 사후 평가가 나왔다…. 예하 부대에서 성과를 부풀려 보고했고, 미국은 이것을 토대로 북베트남이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은 후에 ‘통계가 망친 전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진격의 10년, 1960년대〉 김경집)

(미국 중심의) 심리학과 관련해 ‘weird’란 용어가 있다. 원래 의미는 ‘이상한’, ‘기괴한’이다. 그런데 다른 의미도 있다. White(백인의), Educated(교육받은), Industrialized(산업화한, 혹은 선진화된), Rich(부유한) Democratic(민주주의의)의 약자이기도 하다. 우리가 심리학 서적을 통해 알고 있는 우리의 심리현상은, 사실 우리의 심리를 표현하고 설명해주는 게 아니다. 바로 이 다섯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이들의 심리학이라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첫 번째 단계에서 탈락이다. 태생적으로 백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핫도그(hot dog)는 도그(dog)가 아니다!  

오해가 안 생기는 질문, 즉 문화를 고려한 질문을 해야 한다.

통계는 일반적으로는 믿을 만하지만, 그것을 어떤 이들이 고의로 악용할 수 있다. 혹은 통계 자체의 불완전으로 인해 잘못된 결론으로 유도할 수 있겠다. ‘중국인들의 사람에 대한 신뢰에 관한’ 위의 사례에서도 짚어봐야 할 지점이 있다. 경험적으로도 믿기 어려운 통계 사실에 대해 그 가능성을 소개해 본다.

첫 번째는, 인터뷰에 응한 중국인들이 거짓말을 한 거다. 남을 신뢰한다는 말을 해야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설문인데도?”라고 반문하고 싶겠지만, 중국인은 그렇게 한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데도?”. 중국인들은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두 번째는, 우리가 상정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중국인의 그것과 달랐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람을 ‘대부분의 사람’이라고 상정할 것이다. 그런데 중국인은 다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에 대해서 ‘전혀 모르던 사람’과 ‘알고 지내는 (혈연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의 두 부류 사이에서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하나로 선택하고 답변했을 가능성이 있다.

설문의 응답자들이 만약 ‘대부분의 사람’을 ‘(혈연을 제외한) 내 주위의 대부분의 사람’이라고 상정했다면 위와 같은 (중국인들의 높은 상호 신뢰) 결과는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인들은 ‘내가 알고 지내는’ 대부분의 사람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신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만약 중국인들이 ‘전혀 모르던 사람’을 ‘대부분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답했다면, 첫 번째 가능성이다. 솔직하지 않게 답한 것이다.)

만약 위의 통계에 근거해 “중국인이 우리보다 높은 상호 신뢰를 보인다”라는 결론을 주장하려면, ‘대부분의 사람’에 대해 더 구체적인 서술을 해야 했다.

문자(文字)적으로는 같아도, 뜻은 다를 수 있다.

문화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스턴트맨 등을 속어로 ‘hot dog’라고 부른다고 한다. 약간 과장해보면, “hot dog를 좋아하냐?”라는 간단한 설문지의 답변은 엉뚱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맛있는 핫도그를 떠올리고 대답하겠지만, 어떤 이들은 이런 능력자들을 연상하고 답변할 것이다.

중국인들은 ‘아는 이(우리)’와 ‘모르는 이(타자)’에 대한 구별이 엄격해서, 절대로 모르는 이들에게 이렇게 높은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길에서 노약자가 넘어져도, 누구 하나 도움을 주지 않아서…”라는 식의 뉴스는, 중국에서는 뉴스가 안 될 정도다.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사고가 난 이를 못 본 체하는 그런 심리도 있지만, 주로는 믿지 못해서이다.

이런 신문들은 종종 있었다. 구해주고 났더니, 그 노인네가 “당신이 나를 넘어뜨렸다”라며 피해액을 요구해서 낭패를 당했다는 식의 기사다. 그래서 중국 친구들이 해 준 말이 있다. “운전 중에 사고 난 차량을 보면 어떻게 할 거니?”. 차를 멈추고 도와줘야지 했더니,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면서 “일단, 차를 현장에서 더 멀리 운전하고 나서, 거기서 경찰에 신고해라!”였다.

부모는 자식을 숨겨주고 자식은 부모를 숨겨준다. 올바름은 바로 여기에 있다(父为子隐 子为父隐 直在其中矣). 부자 간(확대하면, 가까운 이)에게는 더 많은 신뢰를 보내는 것이야말로, 진짜 올바름이다.

〈논어 · 자로〉 편에, 섭공(葉公)이 자기네 마을에 올바른 이가 있는데, 아버지가 양을 훔친 것을 증언했다고 하자 공자가 대답한 말이다. “우리 마을의 올바름은 바로 부자간에는 설령 잘못했다 하더라도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덮어주는 것이 지고(至高)의 도리다”라며 가르쳤다.

법은 인정을 도외시하지 않는다(法不外人情). 법외에 인정도 고려해야 한다. 위 논어의 말씀에 대해, 문자 그대로는 공감하고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유검무죄(有檢無罪) 무검유죄(無檢有罪)라는 말이 유행하는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법치에도 (법 자체에? 또는 집행에?) 문제가 있기는 있는 거다. 어차피 완전한 공평이 불가능하다면, 공평하게 ‘인정’을 고려해야 한다고 이해해 볼 수도 있겠다.

‘신뢰’의 정의를 논하려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냐’에 따라 보내는 ‘신뢰’의 차이가 크다. 한편, 같은 문장에 대해서도 맥락을 중시하는 문화(고 맥락 문화)와 맥락 없이 말 그대로 이해해도 되는 문화(저 맥락 문화) 간의 이해는 다르다. 사장이 “편하게 생각하고, 애로 사항을 말하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는 우리 사회라면, 우리도 고 맥락 문화다.

고 맥락과 저 맥락 문화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설문지의 질문이 “문자적으로 같으므로, 내용도 같다”라는 명제는 틀리다. 후쿠야마는 “미국과 일본 같은 사회는 고(高)신뢰 사회”라고 하면서, 중국은 사람이 사람을 못 믿는 “저(低) 신뢰사회”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 대해 중국인들은 “부모와 자식 간에도 계약서를 쓴다는데, 그게 맞냐?”며 반문한다. 서구는 아는 이와 모르는 이에게 (상대적으로) 비슷한 정도의 신뢰를 보낸다. 중국은 모르는 이에게는 철저한 의심을, 아는 이에게는 상당한 신뢰를 보낸다.

사례: 어느 한국 기업의 인성 검사 결과. “이게 뭐지요? 죄다 탈락이에요!”

저 맥락의 질문지로는, 고 맥락 문화의 중국인을 파악하기 어렵다.

설문지를 만들 때, “중국식으로 고려했어요!”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어찌 보면 성의 없는 대답이다. 고려는 했겠지만, 그 정도가 중요하다. 정말 정말! 신중하게 단어 하나라도 고민해야 한다.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한다면, 세밀하게 연구해서 질문지를 만들어야 한다. 설문지를 통해 답을 얻는 것은,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은 될 수 있다. 하지만, 전제는 ‘문화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모 대기업에서 인력을 채용했다. 채용 관련한 다른 시험을 모두 통과한 이들은 약 20명 정도였다. 들리는 소문으로, 여느 때보다도 지원자들의 수준이 높았다고 한다. 이제 남은 검사는 인성검사뿐이었다. “우리 회사의 인성검사는 한국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며, 그것을 실행하면서 현지화의 성공 사례처럼 자랑했다. 한국인 간부들은 본인의 입사 경험상, 인성검사는 아주 이상한 성격 결함이 없으면 통과될 거라고 여겼다. 신입직원에 대한 기대가 부풀었다.

흔히 인성검사의 팁은 “뭐든 일관되게 솔직하게 답하라”라고 한다. 비슷한 질문을 중복으로 질문하면서, 응시자의 진솔성을 파악하는 게 인성검사라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라도 일관성을 유지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크게 벗어나서 탈락하는 이들은, 최소한 경험적으로는 들은 사례가 없었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좋은 인재를 자기 부서로 데려오려는 경쟁이 벌어졌다. 단 한 명만 빼고 나머지 모든 지원자를 두고, 여러 부서가 경쟁이 붙었다고 한다. 인사팀에서도 각 관계사의 요구를 조율하느라, 벌써 바쁘다. 그런데, 최종 입사 발표자 결과가 나오자 인사팀을 포함해서 모두 경악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던 그 한 명만 빼고 ‘전군복멸(全军覆灭, 전군이 사망하다)’, 모조리 탈락했다. 인성검사 결과, 구제 불능의 불합격이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나?

당시의 인성검사는 지나치게 비정상만 아니라면 탈락시키는 경우가 없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매우 정상적이고 우수해 보이는 모든 지원자가 모조리 탈락했다. 선을 넘은 비정상 내지는 인성이 심각하게 부적격하다는 평가를 받았겠다. 유일하게 통과한 합격자는 부서 배치 후에 “자기주장이 강해서, 남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공주병에 걸렸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주관이 뚜렷했다.

원래 것을 건들지도 않다(原封不动)고 한 번역은, 오역(誤譯)되기도 한다.

통계이든 면담이든, 그 결과를 가지고 판단의 근거로 삼으려고 한다면, 질문지에도 ‘문화에 대한 이해’가 반영되어야 한다.

서양인들은 설문지를 메꿀 때 매우 진지하다. 중국인들이 설문지를 답할 때는 일반적으로 상황에 따라 대답한다. …… 사람을 뽑을 때, 만약 설문지의 형식을 사용한다면 인재를 찾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해(利害)에 따라 답하기 때문이다. (〈领导统御智慧〉杨智雄 외)

홍콩에 있는 미국 기업의 사례다. 면접에서 자신의 문화혁명 시기의 가족사를 소개한 학생이 채용되었다. 이후로 수많은 중국인 응시생들도 면접장에서 같은 얘기를 했다. 남의 이야기로 면접에 응했다는 사실에, 미국인 면접관들은 당황했다. 반면, 중국인 면접자들은, 자신들의 천편일률적인 대답이 긍정적인 결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서구식의 문답을 그대로 번역해서 가져오면, 중국인들은 헷갈리기 쉽다. 간단한 질문임에도, 무엇이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전후 맥락을 이해해야 대화가 가능한) 고 맥락 문화의 질문과 대답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저 맥락 문화의 사람들이 이해 못 하듯이, 반대의 경우도 똑같다. 한국의 인성검사의 질문을 대하는 중국 직원들은, 질문자의 의도를 지나치게 고민한 듯하다. 좋은 인성의 소유자로 보이기를 바란 듯하다. 저 맥락의 기준으로 볼 때는, 지나쳐도 한 참 넘어섰다. 결국 합격의 최저선도 넘지 못하는 점수를 얻었다. 모조리 탈락했다.

곡조는 달라도 완성도는 똑같다(异曲同工).

어려운 작업이지만, ‘필요하니까’해야 한다.

설문(혹은 심지어 면접)을 통해 무엇인가 특히 (정량적인 것이 아닌) 정성(定性)적인 것을 알아내려고 한다면, 내용은 물론이고, 낱말 하나에도 고민을 해야 한다. 있는 것을 그대로 가져오거나(生搬硬套), 단순히 번역만 해서 사용하며, ‘현지화 실천’이라고 여긴다면 정말 어이없다. 사실 이는 우리들의 중국 실력 문제뿐 아니라, 성의가 없는 거다. 직역은 성실해 보이기는 하지만, ‘문화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은 직역은 오해만을 일으킨다. 틀린 정보를 ‘옳은 것, 숫자가 입증하는 확실한 것’으로 믿게 끔도 한다. 세밀한 고민을 통한 번역(때로는 의역)이 필요할 것이다.

옥도 다듬지 않으면 물건이 못 된다(玉不琢 不成器).

정보가 올바르게 해석되어야, 그렇게 쌓인 지식이 비로소 가치가 있다. 그러려면, 정보를 구하는 방법 역시 공부를 해야 한다.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게 중요하다. 실패해도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하더라도) 겪은 것은 성실하게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수많은 “내가 이런 일 있었거든!” 이 얘깃거리로만 소비되는 것이 안타깝다. 술자리에서의 영웅담 수준을 넘어야, 비로소 정보가 된다. 수교한 지 30년이다. 누적된 정보도 적지 않고, 경험도 많다. 그것을 꿰어내야 보석 같은 지식이 되고, 중국 실력이 된다. 개인과 기업뿐 아니라, 국가경쟁력이 된다.

류재윤 협상∙비즈니스 문화 저술가

더차이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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