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눈보라 뚫고 사흘 걸어 입대했다"…철모도 없던 127명 학도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매년 6월 1일이면 백발의 신사들이 강원도 태백중학교의 충혼탑에 모여 추모제를 연다. 그리고 다음 날인 2일엔 철원의 제3 보병사단(백골부대)으로 옮겨 추모제를 더 연다.

노병(老兵)들의 정체는 화백회 회원들이다. 화백회는 6ㆍ25 전쟁 때 학도병으로 참전한 태백중 학생들의 모임이다. 3사단은 이들이 싸웠던 부대다. 화백회 추모제는 올해 70번째 치러졌다.

이용연(88) 화백회 회장. 화백회는 6ㆍ25 전쟁 때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태백중 학생들의 모임이다. 박영준 작가

이용연(88) 화백회 회장. 화백회는 6ㆍ25 전쟁 때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태백중 학생들의 모임이다. 박영준 작가

지난 2일 철원에서 만난 이용연(88) 화백회 회장은 “6월 1일은 1951년 우리가 정식으로 군번을 받은 날”이라며 “52년 화백회를 만든 뒤 매년 이날에 만나 전사한 친구들을 기리자고 맹세했다. 화백회 추모제가 현충일(1956년 제정)보다 빠르다”고 말했다.

화백회의 이름은 당시 3사단장인 백남권 준장이 화랑도의 ‘화’와 태백의 ‘백’자를 따서 지어줬다는 게 이 회장의 설명이다.

태백중의 학생 127명은 1951년 1월 9일 교정에서 학도병 참전을 결의했다. 태백을 점령했던 인민군이 친구들을 강제로 의용군으로 끌고 가는 등 행패를 부린 데 격분하면서 내린 결정이었다. 이 회장은 “나이는 어렸지만, 적개심이 끓었다”고 그 순간을 기억했다.

태백중에서 수학을 가르쳤던 박효칠 선생님도 함께 길을 나섰다. 태백중이 첫 부임지였던 박 선생님은 앳된 학생들만 전쟁터에 보내선 안 된다며 ‘인솔교사’를 자처했다. 박 선생님은 전쟁이 끝난 뒤인 75년 작고했다.

박 선생님과 태백중 학생들은 당시 육군본부가 있었던 울산으로 향했다. 먹을 것을 담은 복대를 차고 눈보라를 뚫으며 사흘 만에 경북 봉화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3사단 23연대를 만났다.

군 당국은 처음엔 “학생들은 공부하는 게 애국”이라며 입대를 말렸다. 그러나 이들은 ”38선을 다시 돌파하면 학교로 돌아가겠다“며 간청했다. 또 127명 중 25명은 너무 어려 군 당국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했다. 그러자 이들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태백중 학생들은 나이를 속이고 흙더미 위에서 까치발을 서 키를 쟀다. 이들의 애국심에 진 군 당국은 127명 전원의 입대를 허락해 모두 학도병 중대에 편성했다.

태백중 학도병들은 훈련도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그해 1월 26일 영월군 녹전에서 첫 전투를 치렀다. 군복도 없어 철모 대신 학생모를 썼고, 소총 한 자루와 수류탄만 들었다. 여기서 손길상 학우를 잃었다. 첫 전사자였다.

5월 현리 전투에선 13시간 넘게 지연전으로 중공군을 붙잡아 3군단의 퇴로를 열었다. 그러나 학우 2명이 숨졌다. 이 회장은 “친구들의 시신을 묻으며 다들 대성통곡했다. 아직도 그때가 생각난다”고 말했다.

드디어 태백중 학도병들은 6월 1일 정식으로 군번을 받았다. 입대 6개월 만이다. 이후 평창·안흥·횡성·원주·제천·철원 등지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그러면서 모두 18명이 전사했다.

화백회 회원들은 매년 6월 2일 제3 보병사단 사령부 안에 있는 전적비에서 추모제를 연다. 이용연 회장(오른쪽) 등 회원들이 전사한 친구들에게 경례하고 있다. 3사단

화백회 회원들은 매년 6월 2일 제3 보병사단 사령부 안에 있는 전적비에서 추모제를 연다. 이용연 회장(오른쪽) 등 회원들이 전사한 친구들에게 경례하고 있다. 3사단

피 끓는 청춘이었던 태백중 학도병들은 이제 모두 팔순이 넘었다. 화백회 회원도 12명만 남았다. 그중 2명은 행방을 모른다고 한다. 거동이 불편한 회원도 늘어나 올해 추모제엔 6명만 참석했다.

이 회장은 “전쟁이 끝난 뒤 사회가 알아주지도 국가에서 대우해주지도 않았지만, 나라를 위해 싸운 것에 후회는 없다. 다시 그때로 되돌아간다면 학도병으로 참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