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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세직의 이코노믹스

“경기 부양에 힘빼지 말고 인적자본 키우는 데 힘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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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루카스 경제학의 유산과 교훈

김세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김세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경제학자들은 문제 해결사다. 위대한 경제학자는 더욱 그렇다. 어떤 나라든 불황, 실업, 인플레이션, 제로성장 같은 심각한 경제 문제에 끊임없이 봉착한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 해결사가 간절히 필요할 때 혁명적인 아이디어로 문제의 해법을 제시하는 경제학자가 등장하곤 한다. 그런 경제학자로 인한 복지 증진은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 시민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지난 5월 15일 이런 해결사 경제학자 한 명을 잃었다. 1995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 시카고대의 로버트 루카스 명예교수다.

케인스 정책, 대공황 극복 기여
하지만 70년대 인플레 부작용도

“개인 대응에 정책 효과 사라져”
루카스 ‘합리적 기대 가설’ 반향

“인적 자본이 경제성장 원동력”
성장 처방 필요 한국에 시사점

‘합리적 기대 혁명’ 주도한 루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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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반세기 통틀어 가장 위대한 거시경제학자가 루카스 교수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경제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루카스 교수는 1970년대에 이미 ‘합리적 기대 혁명’을 이끌며 30대의 나이에 거시경제학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우리 시대의 대가였다. 훗날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토마스 사전트 교수가 80년대에 쓴 교과서에 나오는 경제이론의 핵심들도 결국 루카스 교수가 새로 만들어낸 경제학이었다.

경기침체를 다루는 거시경제학은 또 다른 위대한 해결사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로부터 시작되었다. 1929년 대공황 이후 세계 경제가 아직도 불황으로 허덕이던 1936년 케인스는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이라는 책을 통해 불황의 원인을 진단하고 놀라운 해결책을 제시했다.

케인스는 물건에 대한 나라 전체의 총수요가 줄어들면 이에 맞추어 나라의 총생산, 즉 GDP도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기업가의 총투자가 갑자기 줄어들면 그만큼 물건에 대한 총수요가 줄어들어 나라의 GDP도 줄어들고 불황이 찾아온다고 진단했다. 이때 정부가 지출을 직접 늘리거나 돈을 많이 풀어 다른 총수요 요인을 늘려주면 불황을 타개할 수 있다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러한 케인스의 아이디어는 이후 경제학계의 주류가 되고 여러 나라 거시정책의 지침이 되었다. 특히 국민의 총소비가 총소득의 일정 비율로 정해져 있다는 가정에 따라 정부의 경기부양책이 GDP를 얼마만큼 증가시킬지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는 믿음 하에 정책 처방이 이뤄졌다.

돈 푸는 경기 부양의 한계

그런데 70년대 들어 총수요 부양정책이 인플레이션만 증가시키는 가운데 루카스 교수는 이러한 케인스식 정책 처방의 타당성에 대해 ‘루카스 비판(Lucas Critique)’이라고 부르는 근본적 반론을 제기한다. 정부가 정책을 변화하면 국민은 이에 따라 경제가 어떻게 바뀔지를 예상한다. 그리고 이러한 예상에 따라 자신의 경제적 선택을 바꿀 텐데, 기존의 케인스식 정책은 이러한 민간 경제 주체들의 대응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는 치명적 약점을 갖고 있었다.

이에 루카스 교수는 케인스식 정책의 중대 문제점을 해결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새 분석 틀의 핵심은 나라 전체의 GDP를 분석하더라도 그 출발은 나라를 이루는 개개인에 대한 분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숲을 분석하기 위해 그 숲을 구성하는 나무들을 먼저 봐야 하는 것처럼. 특히 정부 정책에 따라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합리적으로 예상하고, 그 예상에 따라 자신의 경제적 선택을 바꾸는 개인들에서부터 출발하는 분석 틀을 이용해야 함을 역설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더 나아가 루카스 교수는 그가 해결책으로 제시한 틀에 따라 분석하면 케인스식의 전통적 총수요 부양정책이 별 효과가 없을 수 있음을 다양한 연구를 통해서 밝혔다. 예를 들어,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는 확장적 통화정책은 인플레이션에 대한 민간의 기대 변화를 일으켜 장기적으로는 실업을 줄이는 데 그다지 효과가 없음을 보여줬다.

그의 연구 결과, ‘합리적 기대 혁명’이라는 놀라운 변화가 1970년대에 일어났다. 이후 40년 넘게 거시경제학자들은 루카스가 구축한 방법에 따라 거시 정책 분석을 하게 됐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프레스콧은 진정한 ‘과학으로서의 거시경제학’은 루카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단언했다.

인적자본 수익률 따라 성장률 좌우

1970년대에 경기변동이라는 거시경제학의 전통적 분야에서 이미 혁명적 변화를 일으킨 루카스 교수는 80년대부터는 연구 주제를 경제성장으로 전환한다. 한가지 이유는, 그가 1987년 논문을 통해 증명했듯이, 경제성장을 증대하는 것이 경기변동 진폭을 줄이는 것보다 사람들의 행복을 훨씬 더 많이 늘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가난에 허덕이는 지구촌 수많은 나라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경제성장을 통해 빈곤의 덫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경제성장의 해결사로 등장한 루카스 교수는 1988년 성장의 원동력에 관한 논문을 출간해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논문으로부터 ‘내생적 성장이론’이라는 새로운 경제성장이론이 탄생하게 된다. 이 논문에서 루카스 교수는 ‘인적자본(human capital)’, 즉 교육 등을 통해 근로자나 기업가에 체화된 지식이나 기술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임을 논증하였다. 특히 인적자본 투자에 대한 수익률이 높은 나라일수록 사람들이 교육에 더 많이 투자하고, 그 결과 인적자본이 빠르게 축적되어 경제성장률이 높아짐을 보였다.

루카스 교수의 이론에 따르면, 정부가 인적자본의 수익률을 높이는 정책(예를 들어 근로소득세 인하 정책)을 쓰면 성장률을 높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성장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루카스의 이론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에 성장정책을 통해 오랜 가난과 저성장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밝혀줬다.

루카스의 성장이론은 우리나라 성장문제에도 중요한 함의를 던져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필자가 지난 2016년 논문에서 제시한 ‘5년 1% 하락의 법칙’에 따라 장기성장률이 1990년대 이후 30년간 추락하여 이제 0%대를 향해가고 있다. 성장을 다시 회복할 처방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런 우리에게 아인슈타인 같은 소수의 천재가 아니라 다수의 평범한 국민의 인적자본 특히 ‘아이디어’의 중요성을 강조한 루카스 교수의 이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인적자본과 아이디어를 촉진할 수 있는 정책과 제도를 제대로 도입하기만 하면 고속 성장을 회복할 수 있음을 강력히 제시하고 있다.

만약 루카스 교수가 한국 정부에 조언한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과도한 경기부양책은 민간의 대응으로 인해 무력화되거나 인플레이션이나 부동산 가격 급등 등 부작용만 클 수도 있습니다. 엉뚱한 데 힘 빼지 마시고 다수 국민의 아이디어와 인적자본을 촉진하는 성장 정책과 제도를 만드는 데 집중하세요!”

한국과 루카스 교수의 인연

로버트 루카스 교수 [노벨상 홈페이지]

로버트 루카스 교수 [노벨상 홈페이지]

루카스(사진) 교수는 누구보다도 한국을 깊이 이해하고 한국의 고속성장을 높이 평가한 경제학자였다. 1980년대 경제성장의 원동력을 찾아 나선 그가 새로운 경제성장이론을 전개하기 위해 주목한 나라도 바로 한국이었다. 루카스 교수는 ‘기적 만들기(Making a Miracle)’라는 논문에서 1960~80년대 한국의 고속성장에 경탄하며 이를 ‘기적 성장’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한국을 농구 역사상 최고의 슈퍼스타 마이클 조던에 비유하며, 마이클 조던을 분석하여 농구를 배우듯이 한국을 보고 빠르게 성장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루카스 교수가 이론적으로 밝힌 한국으로부터 배워야 할 고도성장의 비법은 바로 ‘경제성장의 엔진은 인적자본’이라는 것이었다. 한국의 고도성장은 세계 경제학계에도 큰 영향을 미쳐 ‘내생적 성장이론’이라는 새로운 경제성장이론의 탄생까지 유발했는데, 이는 오로지 루카스 교수의 연구와 논문을 통해서 가능했다.

85세로 타계한 루카스 교수는 많은 한국 학생의 지도교수가 되어 탁월한 경제학자들을 한국에 안겨 주었다. 이지순 서울대 명예교수를 비롯한 많은 학자가 루카스 교수의 가르침을 받았다.

루카스 교수는 필자의 지도교수이자 평생의 멘토이기도 했다. 1989년 가을 어느 날 연구실에서 경제성장의 중요성을 열정적으로 강조하며 필자에게 한국 고도성장의 비결을 탐구하는 논문을 써 볼 것을 권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케인스나 프리드먼 같이 우수한 한국 학생들을 키워 당신에게 보내달라던 말씀도 귀에 쟁쟁하기만 하다. 아, 루카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