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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피해자를 가해자 만들어…59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1964년 ‘김해 혀 절단 사건’의 당사자 최말자씨가 지난달 3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개시를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1964년 ‘김해 혀 절단 사건’의 당사자 최말자씨가 지난달 3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개시를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어 놓고 잘못된 게 없다고 합니다. 59년 전이나 지금이나, 법원은 변한 게 없어요.”

2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최말자(77)씨는 법원을 향한 분노를 쏟아냈다.

최씨는 정당방위 논란 때마다 언급되는 ‘김해 혀 절단 사건’의 당사자다.

강제로 키스하려던 남성의 혀를 절단한 여성이 중상해죄로 처벌받은 사건으로, 국내에서 정당방위 인정 범위가 극히 제한적임을 드러낸 대표적 사건이다.

2020년 최씨가 재심을 청구하면서 사건은 ‘56년만의 미투’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1, 2심 모두 ‘재심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이제 대법원의 판단만 남은 상태다.

1964년 5월 6일, 18살 최씨는 모르는 사이이던 21살 남성 노모씨에게 성폭행을 당할 뻔했다. 남성은 길을 알려주려 따라나선 최씨를 바닥에 눕히고 배 위에 올라탔다. 최씨가 저항하자 세 차례 바닥에 넘어뜨리기도 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남성이 최씨 입 안에 혀를 넣은 상태였다. 최씨는 혀를 깨물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도망쳤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며칠 뒤 남성이 친구 10여 명을 대동해 최씨 집을 찾았고, 칼을 든 채 “사람을 불구로 만들었으면 책임지라”고 위협했다.

최씨 가족들은 노씨를 특수주거침입과 특수협박 혐의로 고소했고, 남성은 최씨를 중상해죄로 맞고소했다.

법원은 남성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최씨에게는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최씨의 정당방위 주장을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였다.

당시 법원은 남성이 최씨를 넘어뜨려 코를 손으로 막아 입을 벌리게 한 뒤 억지로 키스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반항을 못 하도록 꼼짝 못 하게 해 놓고 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판사는 “(남성의) 혀를 끊어버림으로써 일생 말 못하는 불구의 몸이 되게 하는 것과 같은 방위 행위는 일반적, 객관적으로 볼 때 법이 허용하는 상당한 방위의 정도를 지나친 것”이라고 판단했다. 방어가 과했다는 뜻이다.

최씨는 “부모를 망신시킨 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공장과 노상 좌판을 전전하던 최씨는 60이 넘은 나이에 주변 도움으로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2013년 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에 입학해 ‘성 사랑 사회’라는 과목에서 ‘젠더 폭력’ 개념을 처음 접했다.

최씨는 “과거 못 배우던 시절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내가 당했던 것이 성폭력이었다”며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여성의 인권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고 말했다.

최씨는 ‘내가 걸어온 길, 앞으로의 길’이라는 주제로 졸업 논문을 쓰면서 처음으로 속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었다. 재심 청구는 이 과정을 지켜본 방통대 동기의 제안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2021년 부산지방법원은 “재심을 할 만큼 바뀐 사실은 없다”며 청구를 기각했다.

결정문에는 “반세기 전에 오늘날과 다른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이뤄진 일이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여 사회문화 환경이 달라졌다고 하여 당시의 사건을 뒤집을 순 없다”고 적혔다.

최씨는 모욕당하는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반세기 전 재판’이라 어쩔 수 없다니, 그럼 그때는 대한민국 법이 아니었다는 뜻인가요? 법을 바꿔 달라는 게 아니라 법대로 해 달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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