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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살 이서 울린 36살 이승기? 국회 추진 '이승기법' 황당 파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소속사로부터 정산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돈을 떼이는 연예인을 막기 위해 추진되는 일명 ‘이승기법’에 대해 연예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난해 11월 가수 이승기씨가 18년간 몸담아온 후크엔터테인먼트로부터 음원 사용료를 받지 못했다고 폭로하며 시작된 ‘이승기 사태’는 곧바로 정치권의 연예인 권리 보호 논의로 이어졌다. 연예인 소속사의 수익 정산 내역을 의무 공개하는 내용의 이승기법(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개정안)이 발의됐고, 지난 4월 21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문턱까지 넘었다.

법안에는 ▶연예인의 요구가 없더라도 소속 기획사는 회계 및 보수 내용을 연 1회 이상 반드시 제공하고 ▶불공정 행위를 막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필요할 경우 사업자로부터 관련 업무에 대한 보고를 받거나 관련 자료 제출 및 사업자의 출석을 요청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겼다. 여기까지는 연예계에서도 환영하는 내용이다.

지난 2월 15일 오후 서울 마포구 스탠포드호텔에서 열린 예능 '피크타임(PEAK TIME)' 제작발표회에서 가수 겸 배우 이승기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월 15일 오후 서울 마포구 스탠포드호텔에서 열린 예능 '피크타임(PEAK TIME)' 제작발표회에서 가수 겸 배우 이승기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쟁점이 된 부분은 청소년 연예인의 근로 시간과 관련한 내용이다. 소속사와의 투명한 정산 관계 보장이라는 당초 목적과 달리 국회 논의를 거치면서 추가된 내용이다. 애초 이 내용은 이승기 사태가 터지기 전인 지난해 5월 유정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법안에 있던 내용인데, 국회 심사 과정에서 병합됐다. 문체위 관계자는 “이승기법이 주목받자 소위 숟가락 얹기식 내용이 여럿 포함됐다”고 말했다.

법안은 현행 ‘15세 미만은 주 35시간, 15세 이상은 주 40시간’으로 규정된 청소년 연예인 노동시간 상한 규정을 세분화하고 단축했다. ‘12세 미만은 주 25시간(1일 6시간 초과 금지), 12세 이상 15세 미만은 주 30시간(1일 7시간 초과 금지), 15세 이상은 주 35시간(1일 7시간 초과 금지)’으로 규정했다. 또 ‘15세 이상은 당사자 간 합의에 따라 일주일에 최대 6시간까지 근로 시간을 연장할 수 있다’는 현행 조항도 ‘5시간’으로 줄였다.

홍익표 국회 문화체육관광 위원장이 지난 4월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뉴스1

홍익표 국회 문화체육관광 위원장이 지난 4월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뉴스1

이렇게 36살 이승기와 관련도 없는 청소년 연예인 근로 시간 문제가 느닷없이 추가돼 국회에서 논의되자, 업계에선 즉각 반발이 터져 나왔다. 한국음악콘텐츠협회·한국연예제작자협회·한국매니지먼트연합·한국음반산업협회·한국음악레이블산업협회 등 5개 단체는 지난달 16일 성명서를 내고 “업계와 논의 없이 의결된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개정안에 대해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연령을 세분화해 청소년 연예인의 용역 제공 시간을 제한하는 이번 개정안은 현실을 외면한 ‘대중문화산업 발전 저해 법안’”이라고도 주장했다.

업계가 이례적으로 성명까지 내며 국회에 반발한 건 법안과 현실의 괴리가 크다는 판단 때문이다. 헤어·메이크업 등 준비 시간과 이동 시간 등을 고려하면 하루에 6~7시간으로 시간을 제약하면 사실상 활동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걸그룹 뉴진스의 다니엘(19살)· 해린(18살)·혜인(16살), 아이브의 이서(17살) 등 국내 아이돌 그룹엔 이 법안을 적용받을 청소년이 많이 있다. 이들은 이미 현행법 체제에서도 심야 시간대 콘서트와 시상식 엔딩 무대에 참여하지 못한 적이 여러 번 있다.

국내 3대 연예기획사 중 한 곳에 근무하는 관계자는 “해당 법안은 보통 청소년 시기부터 20대 초까지가 전성기인 아이돌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며 “국회가 현실도 모른 채 청소년 연예인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밀어붙인 법안이 역설적으로 ‘청소년 연예인 데뷔 방지법’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국내 연예 업계는 단순히 공연만 하는 게 아니라, 연습 과정이 포함된 육성형 체계”라며 “하루 6~7시간으로 제한하는 건 연예인 육성을 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소 연예기획사에선 더 큰 우려가 나온다. 소규모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하이브 같은 대형 기획사는 별도의 연습장이 완비돼 있고 동선을 최소화한 장소 섭외도 상대적으로 쉽다”며 “우리 같은 작은 회사들은 장소 섭외 및 이동에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돼 근로 시간 제한에 더 큰 타격을 입는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예를 들어 일주일에 2회 장소를 섭외해 몰아서 하던 뮤직비디오 촬영도 법안이 통과되면 일주일에 6번 쪼개서 촬영을 해야 할 수 있다”며 “장소 섭외 비용이 크게 늘면 우리 같은 회사는 뮤직비디오도 제대로 못 찍는다”고 토로했다.

법안이 청소년 연예인의 자아실현을 막는다는 의견도 있다. 청소년 연예인에게 뮤직비디오 촬영 및 공연 활동은 같은 나잇대 학생이 공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공부 시간은 제한하지 않고 연예인 활동만 제한하면 성장을 가로막는 것과 같다는 주장이다. 지난달 23일 한국음악콘텐츠협회는 내부 검토 자료에 “법률로 연령별 활동 가능 시간에 차이를 두면 구성원별 활동 가능 시간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 활동에 상당한 제약이 발생한다”고 썼다. 협회 관계자는 “학생들의 ‘학구열’은 존중하면서, 꿈을 이루기 위한 청소년 연예인의 노력은 왜 제한해야 하느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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