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쯤인가? 야밤에 현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더라고요. 많이 힘들었나 봐요.”
24일 인천 미추홀구의 한 아파트 앞. 박모(49)씨는 수척한 얼굴로 이웃인 이모(45)씨를 마지막으로 봤던 순간을 회상했다. 박씨와 같은 층에 사는 이씨는 이날 오전 9시 47분쯤 미추홀구의 한 도로에 세워진 자신의 차량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틀째 연락이 안 되고 어제부턴 출근도 하지 않았다”는 회사 동료의 신고를 받고 119구급대가 출동했지만, 이씨는 구조되지 못했다. 이씨는 이른바 ‘건축왕’으로 불린 건축업자 남모(62)씨의 전세사기 피해자였다. 숨진 이씨의 곁엔 손글씨로 적힌 유서가 놓여있었다고 한다. 이날 오후 6시 30분쯤 이씨의 차량이 서있던 자리엔 생전 그가 산 것으로 추정되는 로또 복권 5장과, 그의 죽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적힌 찢어진 종이들이 흩어져 있었다. 한쪽 귀퉁이는 불에 그슬린 채였다.
이씨는 생전 인천의 한 소방설비업체에서 일했다. 20대 후반이던 2008년쯤 입사해 안전 관리 업무를 담당했다. 매월 한 차례씩 건물을 찾아 안전 설비 등을 점검하는 업무였다. 한 차례 이직을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돌아올 정도로 일에 대한 열정도 있었다고 한다. 한 직장 동료는 이씨에 대해 “회사를 빠지는 일 없이 10년 넘게 성실하게 일했다”고 말했다.
그런 이씨의 얼굴에 깊은 그늘이 드리운 건 지난해 가을쯤이었다. 갈수록 말수가 줄어드는 이씨가 걱정돼 동료들이 이유를 물었더니 “살던 집이 경매에 넘어갔다”며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인천시 등에 따르면 이씨는 2018년 6월 보증금 6200만원에 전세 계약을 맺고 미추홀구의 한 아파트에 입주했다. 2017년 2월 근저당이 설정된 아파트였다. 하지만 새집을 얻었다는 안도감은 잠시였다. 이씨는 지난해 11월쯤, 자신이 사는 집이 임의경매(담보권의 실행 등을 위한 경매)에 넘겨졌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자신이 조직적 전세 사기의 피해자라는 걸 알아챈 건 그보다도 한참 뒤였다. 이씨를 집어삼킨 전세사기의 중심에 ‘건축왕’ 남씨가 있었다. 남씨는 다른 사람 명의를 빌려 토지를 매입한 뒤 소규모 아파트나 빌라를 지었고, 공인중개사를 시켜 전세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대출금과 전세보증금 수입에 의존해 대출이자와 직원 급여, 보증금을 돌려 막았다. 그러나 불어나는 이자를 감당하지 못했고, 지난해 1월부터 남씨가 실소유한 주택 690채가 차례로 경매에 넘어갔다. 이씨의 전셋집 역시 그중 하나였다.
조직적 전세 사기에 당한 사실을 알아챘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별로 없었다. 구제는 요원했다. 주택 낙찰자가 나오더라도 주택 임대차보호법에 따라 돌려받을 수 있는 건 최우선변제금 2700만원이 전부였다. 아파트 관리비를 열 달 넘게 미납할 정도로 생활고를 겪었던 이씨에겐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이씨는 지난달 25일, 주위의 조언을 듣고 알게 된 인천 전세사기 피해지원센터에 도움을 요청했다. 법률 상담을 받으면서, 경매에 따른 구제 방법을 문의했다. 하지만 이씨는 피해 확인서를 발급받지 않았고, 긴급 주거나 금융 지원 신청도 하지 않았다. 경찰에도 전세사기 피해 신고를 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씨의 비극은 그가 세상을 등진 이후에야 주위에 알려졌다.
앞서 인천 미추홀구에서만 남씨에게 전세사기를 당한 피해자 3명이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지난 2월 28일엔 전세 계약을 맺고 미추홀구의 한 빌라에 입주했지만, 보증금 7000만원을 돌려받지 못한 30대 전세사기 피해자가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휴대전화에 남긴 유서에 ‘(전세 사기 관련) 정부 대책이 굉장히 실망스럽고 더는 버티기 힘들다. 저의 이런 결정으로 이 문제를 꼭 해결했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이어 지난달 16일엔 전세사기 피해자 임모(26)씨가 자택에서 숨졌다. 그는 사망 닷새 전 어머니와의 통화에서 “2만원만 보내달라”며 울먹였다고 한다. 다시 사흘 뒤엔 전세사기 피해자였던 전직 해머던지기 선수 박모(31)씨가 세상을 떠났다.
한편 국회 국토교통위원회는 지난 22일 법안심사소위를 열고 전세사기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선순위 근저당이 있거나 갱신 계약으로 최우선변제금 적용 대상에서 벗어난 피해자에게 경·공매 완료 시점을 기준으로 산정한 최우선변제금만큼의 자금을 최장 10년간 무이자로 대출해 주는 내용이다, 그러나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는 이날 논평을 통해 “빚에 빚을 더하는 방식으로 세입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