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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과 응세권 찾는다" 사라지는 소아응급실, 속 타는 부모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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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응급실 사진.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 연합뉴스

소아응급실 사진.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 연합뉴스

“아이 키우니 ‘응세권(응급실+역세권)’을 무시할 수 없네요.”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40대 주부 A씨는 지난 15일 새벽 8세 아들이 고열과 함께 두드러기·발진 증상 등을 보여 인근 한 종합병원 응급실을 급히 찾았다.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찾아간 병원에서는 “소아는 받지 않으니 119로 전화해 갈 수 있는 응급실을 물어보라”는 답을 들었다고 한다. 응급실에서 다른 응급실을 찾게 된 것이다. A씨는 23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119에 전화해 사정을 설명하니 상담원도 안 믿더라”고 전했다. 당시 고양시 내에서는 소아를 받아주는 응급실이 단 한 곳도 없었다. A씨는 119에서 안내받은 서울 내 대학병원 응급실 2곳에 전화를 했지만 두 곳 모두 연결이 되지 않았다. 아픈 아이를 안고 헤매던 A씨는 결국 집에 돌아와 얼음 찜질을 하며 아이를 돌봤다고 한다. 아이는 밤새 고열에 시달렸다. A씨는 “응급실 앞에서 아이 하나가 죽어야 달라질까 싶었다”라며 “이런 상황에서 무슨 아이를 낳으라고 하나”라며 답답해했다.

순천향대병원, 이달부터 소아과 야간 응급실 중단

지난 3월 29일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가 ‘소아청소년과 폐과와 대국민 작별인사’라는 제목으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3월 29일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가 ‘소아청소년과 폐과와 대국민 작별인사’라는 제목으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주요 상급종합병원 등에서 최근 소아응급실 운영에 차질이 생기면서 A씨처럼 한밤중 아픈 아이를 받아줄 소아응급실을 찾아 헤매는 부모들의 하소연이 잇따른다. 지난 4월 서울의 한 지역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아이가 열나서 응급실 왔는데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없다. 집 근처에 대학병원이 3곳 있어 믿고 살았는데 무섭다”는 하소연이 올라왔다. 지난해 10월 강남세브란스병원이 소아청소년과 응급실 야간 진료를 중단한 데 이어 대형병원 등이 소아응급실 운영을 줄줄이 축소한 여파가 나타나고 있다. 서울 용산구에 있는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은 이달부터 소아청소년과 응급실 야간 운영을 중단했다. 평일·주말 오후 10시까지만 운영한다. 이 병원 관계자는 “의사가 없어 불가피하게 밤 진료를 중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용산구의 맘 카페에서는 “뉴스에서 보던 일이 가까운 주변에서 일어난다” “점점 하나둘씩 사라진다”는 우려 목소리가 쏟아졌다.

야간·휴일 진료가 가능한 소아응급실은 속속 사라지고 있다. 23일 오후 기준 보건복지부 ‘응급의료포털’에서 서울 25개 구 내 응급의료기관을 검색한 결과 이달 소아응급실 운영에 차질이 있는 병원은 5곳으로 파악됐다. 인제대 상계백병원은 ‘월~수 오전 9시~오후 4시 이외 시간 진료 불가능’이라고 알렸고, 경희대병원은 ‘소아과 진료 불가(당직 의사 부재)’라는 안내가 떴다. 문제는 이들 외에도 전공의(레지던트) 등 당직의 상황에 따라 진료 일정이 달라지거나 소아청소년과 의사 없이 응급실을 운영하는 병원이 있다는 것이다. 서울 A병원 측은 “시간대에 따라 야간 소아과 당직의가 없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병원 사정에 따라 진료 가능 시간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서울 B병원 관계자는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소아 응급환자를 받고 있다. 부모 입장에서 불안해 돌아갈 수 있고 병원 판단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이가 아플까 봐 불안한 일부 학부모들은 자구책처럼 소아과 의사가 상주하는 종합병원 응급실의 운영 여부나 시간 등을 미리 공유하고 있다. 소아의료 인력 부족 현상이 어제오늘의 문제는 아니지만 최근 독감 유행 등과 겹치면서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학부모가 적지 않은 분위기다. 이런 글에는 “밤에 아픈 아이들은 어디로 가느냐” “아이는 낳으라고 하면서 키울 환경은 전혀 안 만든다”라는 댓글이 달렸다. 경기도 광명시 내 한 병원이 지난달 27일부터 소아청소년과 응급실을 평일 오후 8시30분까지만 운영한다는 안내를 지난 11일 한 맘 카페에 올린 네티즌은  “여기저기 받아주는 데가 없다. ‘앞으로 어쩌지’하는 생각에 진땀이 났다”라고 적었다.

달빛 빠진 달빛어린이병원…“100곳 늘려봐야 소용없어”

정부는 소아 경증 환자의 야간 응급실 이용 불편 해소와 응급실 쏠림 현상을 막기 위해 2014년부터 ‘달빛어린이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야간·휴일 이용이 쉽지 않아 불만도 뒤따르고 있다.

일요일인 지난 21일 오후 1시쯤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이 고열 증상을 보여 집과 가장 가까운 한 달빛어린이병원(용산구)에 전화해본 40대 이모씨(서울 서대문구)는 “환자가 많아서 아침에 진료 마감했다”라는 안내를 받았다. 이씨는 “주말에 연 병원도 없고 결국엔 응급실을 찾게 되는데 아이들이 아픈데 때가 어디 있나”라고 말했다. 이날 오후 서울 강남구의 한 달빛어린이병원은 “오후 4시까지 내원해야 진료받을 수 있다”고 안내했다. 해당 병원의 일요일 운영 시간은 오후 9시다. 한 병원 관계자는 “환자가 많이 몰리지만, 의사 수는 한정돼 접수를 빨리 마감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대한아동병원협회에 따르면 전국 37개(3월 기준) 달빛어린이병원 중 공휴일 야간진료가 가능한 곳은 5곳(13.5%), 토요일 야간진료가 가능한 곳은 9곳(24.3%), 일요일 야간진료가 가능한 곳은 7곳(18.9%)이다. 휴일·주말 야간 진료를 하는 병원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박양동 대한아동병원협회장은 “소아응급체계 개선책으로 정부가 달빛어린이병원을 내년까지 100곳으로 늘리겠다고 했지만, 병원들이 야간·휴일 운영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라며 “응급실 전 단계 과밀도 해소 등 사업이 원래 취지대로 진행되지 않는 근본 원인을 살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필요한 때 문 여는 소아과나 병원이 없어 부모들이 결국 소아 응급실을 찾게 되는 악순환을 지적한 것이다.

의료계에서는 소아과 전공의가 부족한 것을 원인 중 하나로 짚는다. 올해 전국 수련병원(전공의 교육을 담당하는 2·3차 의료기관) 소아과 전공의 모집 현황을 보면 정원 207명에 지원자는 33명(모집률 15.9%)에 그쳤다.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 회장은 “지난 5년간 소아과 662곳이 폐업하는 등 개원가가 무너지면서 도미노처럼 의료 체계가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라며 “소아 환자 진료에 충분한 보상을 주면서 전공의·전문의에게 정부가 미래를 보여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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