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신수진의 아트풀마인드

불로불사의 예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신수진 문화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신수진 문화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는데, 이제 인생도 만만치 않게 길어졌다. 몸을 기계로 사용하는 물리적 수명도 길어졌지만 미디어 환경의 변화 속에서 ‘살아 있음’의 방식이 달라지는 게 결정적이다.

미디어는 인간의 경험을 확장하는 역할을 해왔다. 복제된 인쇄 활자 매체나 영상 매체가 그랬고, 인터넷의 등장 이후로 온라인에 플랫폼을 차린 모든 매체가 그러했다. 그리고 확장의 방향성은 분명해졌다. 우리의 경험을 더욱 폭넓고 다채롭게 해준다.  나아가 현실세계의 영역을 넓혀온 기술이 이제 현실을 대체할 수 있을지를 시험하고 있는 단계까지 와있다.

새로운 예술플랫폼 ‘보글맨션’
작가 작업실 메타버스에 공개
관객과 작가가 자유롭게 만나
예술가에 영원한 생명 주는듯

시각예술가 플랫폼 ‘보글맨션’에 마련된 심래정 작가의 작업실. [사진 보글맨션]

시각예술가 플랫폼 ‘보글맨션’에 마련된 심래정 작가의 작업실. [사진 보글맨션]

예전 은둔형 예술가가 산속에 살았다면 요즘은 온라인에서 잠행하며 오히려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사회적 활동을 통해서 생명력을 갖는 것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당연한 일이다.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업적을 축적하고 타인에게 알리거나 기억되도록 할 것인가는 온전히 선택의 문제다.

실제로 만난 적이 없는 사람과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서 친구가 되고, 가족이나 어릴 적 친구보다 더 자주 교류하는 일이 어색하지 않은 시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습관적으로 앱을 들춰보거나 아예 온종일 책상 모니터에 접속 상태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 모르는 사람과 절친이 되고 그 친구들과 일하고 밥 먹고 여행도 가는 셈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사회적 활동의 대부분이 ‘친구 사귀기’처럼 달라졌다.

‘보글맨션’은 예술가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고 다양한 친구들을 만들어주기 위해 시작되었다. 시각예술가들의 작업실을 실사 촬영한 후 메타버스로 구현하면서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작가들의 일상 공간과 작품, 이야기를 통합적으로 다룬다. 보글맨션 방문객들은 작업실을 둘러보며 주인장과 대화를 나누거나 작가에게 직접 작품 설명을 듣는 것처럼 공간을 ‘경험’한다. 진행 중인 작품의 에스키스(초벌 그림)를 들여다보거나 마음대로 동선을 바꿔가며 원하는 곳에 오래 머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예술에 특화된 온라인 플랫폼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사례는 사실 거의 없다. 곰곰이 생각을 해봐도 구글이나 네이버 같은 포털이 사용자의 체류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 예술 콘텐트를 제공하는 사례 정도가 떠오르는 정도다.

보글맨션의 메타버스 건축주인 로위랩의 장태원 대표는 예술가로 활동하다 가상현실 신기술을 활용하는 공간 구현 비즈니스에 뛰어들어 지난 3년간 급성장한 시장을 성공적으로 개척했는데, 최근에는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예술 분야에도 이같이 공을 들이고 있다. 자신의 뿌리를 다독이는 의미도 있겠지만 작가들에게 작품을 만드는 공간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장소의 힘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그 열매를 작가들에게 돌려주고 싶은 마음일 게다.

보글맨션은 지난 십 개월 동안 34명의 입주 작가를 위해 계속 증축을 해왔다. 예술가들을 위한 대저택을 거칠고도 힙하게 쌓아 올리고 있는 이곳에 보글보글 끓어오르듯이 부정형적으로 이어지며 증식하는 작가들의 생명력과 공동의 주거 생태계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기술적으로는 소리·글·영상 등 어떠한 정보도 연결할 수 있고, 메타버스 공간을 매개로 모든 정보를 지속해서 업데이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작품 판매나 에이전시 업무도 가능하도록 확장성을 갖추었다.

보글맨션의 집들은 작품만큼 각양각색이다. 입주 작가 중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원로도 있고 새싹 같은 신진도 있다. 단정하고 정리된 작업실이 있는가 하면 대규모 물류창고 같은 작업실도 있고, 정치색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포스터가 붙어 있는가 하면 내밀한 생활인의 흔적이 노출되기도 한다.

보글맨션 초기 입주자인 심래정 작가는 “매일 일하며 생활하는 공간을 샅샅이 보여주기가 쑥스럽기도 했지만, 내가 사라져도 남을, 나에 대한 진솔한 아카이브라는 생각이 들어 참여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작가는 스스로 관리가 가능한 저작권과 판매권을 확보하거나 영생불사의 생명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글맨션은 예술가의 자유로운 영혼에 대한 공감이며 헌사다.

기술이 환경을 급격하게 변화시키는 혁명적 시기마다 인간은 미래에 대한 의문과 두려움을 더 강력하게 가져왔다. 변화 속도가 빠를수록 적응에 대한 스트레스는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두려움이 대세를 거스르진 못한다. 지금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폭발적인 에너지가 분출되기도 한다는 사실에 기대를 걸 때다.

신수진 문화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