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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승현의 시선

병든 약속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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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사회부디렉터

김승현 사회부디렉터

# “약은 효과에 대한 약속이고 신뢰입니다.”

공익광고 같은 제약회사 카피가 귀를 때렸다. 마음속에서 아이유의 삼단고음 같은 ‘삼단공감’이 일어났다. ‘그렇지, 그래야지, 그렇고말고.’ 아픈 사람에게 효과가 있어야 약이요, 약효는 환자에게 꼭 지켜져야 하는 약속이며, 그 약속이 신뢰로 이어져야 약을 사는 것 아니겠는가. 너무도 당연한 ‘양념 없는’ 광고는 뭉클하기까지 했다. 20여 년 전 드라마 ‘허준’에 나왔던 듬직한 배우의 내레이션 때문만은 아니었다. 첨단 센스로 무장한 광고장이는 이 단순함에 울림이 있음을 캐치했다. 흔해 빠진 약속들에 어느덧 실망하고 지쳐버린 소비자를 타깃으로 삼은 것이다.

국민은 모르는 국민과의 약속
강변 앞세운 이익단체 청구서
약속이라면 국민 신뢰 받아야

# “간호법은 5천만 국민과의 약속입니다.”

간호사 단체가 내세운 약속엔 그런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 1년이 지나면서 이런 ‘약속 청구서’를 계속 맞닥뜨리다 보니 불감증이 생겼을까. 약속이라 쓰였지만, 강변(强辯)으로 읽혔다. ‘국민과의 약속’이란 말에 갱년기 울화증을 호소하는 지인도 있다. “내가 국민인데, 도대체 그 약속을 언제 했다는 말이냐?”면서다.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를 통과했다니 말문이 막히고,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다니 어안이 벙벙하다. 거대 야당은 “대통령의 약속은 휴짓조각입니까”라며 공세를 펴는데, 정작 국민은 왕따가 된 기분이다.

도대체 누구의,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약속인가. 그 약속의 시작부터 국민은 휴짓조각이었던 셈이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표만 쫓은 전략과 전술이 공약(公約)이 됐고, 이익 단체는 그 지원군을 자처하며 슬쩍 자기 밥그릇을 끼워 넣었다. 그것을 정산하는 과정엔 어김없이 ‘공약은 국민과의 약속’이라는 공식이 소환됐다. 정치적 약속의 메커니즘은 그렇게 병들어 갔다.

# “재창당의 각오로 근본적 반성과 본격적인 쇄신에 나설 것을 약속드립니다.”

지난 15일엔 또 하나의 약속이 던져졌다. 김남국 의원의 코인 투자 파문을 극복하기 위해 더불어민주당이 채택한 결의문에 그 단어가 등장했다. 그런데,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앞서 김 의원은 코인 문제와 관련한 민주당 의원총회 직전 탈당을 했다. 윤리 감찰을 피하려는 ‘꼼수’라는 지적이 내부에서도 나왔다. 그런데도 김 의원은 ‘잠시’ 당을 떠나는 것이라고 천연덕스럽게 얘기한다. 의혹이 제기된 지 한참인데도 어떻게 투자를 해서 얼마를 벌었는지, 왜 그런 투자를 했는지 설명되지 않았다. 민주당은 그걸 설명하게 만들 능력과 노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데, 쇄신을 약속? 오죽하면 진보 성향 언론사의 사설에 “‘꼼수 탈당’ 김남국을 국회 윤리위에 제소부터 하라”는 일갈이 나왔겠는가. 진상이 궁금한 국민은 다시 휴짓조각 신세다. “약속드린다”는 약속이 계파 이익을 두드리는 계산기 소리로 들리는 이유다.

# “네 마음속에서 날 지우지 마. 약속해줘.”

1998년 영화 ‘약속’의 엔딩 장면을 다시 보게 된 건, 인터넷 포털에서 약속이라는 단어를 검색한 덕분이었다. 25년 전 영화인데도 어떤 알고리즘 때문인지 첫 화면에 떴다. 서로를 껴안은 채, 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전도연)는 눈물이 스며드는 입술에 힘을 주며 말했다. 작은 교회에서의 둘만의 결혼식은 “약속할게”라는 신랑(박신양)의 답변, 홀로 떠나는 발소리, 신부의 흐느낌으로 끝난다. 여의사와 조폭 보스가 사랑에 빠지고, 조직에 대한 의리 때문에 이별하게 된다는 신파극. 그러나, 두 배우의 혼신 연기는 지금도 그 약속이 깨지지 않았을 거란 믿음을 준다. 그 절절한 대사를, 국민을 마음속에서 지워버린 정치권에 들려주고 싶었다.

# “우리 사회가 참 병들어 있구나, 비정상적이구나.”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이 정부 출범 1년을 되돌아보면서 이런 소회를 언급했다고 한다. 병든 우리 사회의 모습으로 전세사기, 펀드·코인·주가조작, 불법대출, 조폭 노조, 탈원전 정책, 가짜뉴스, 간첩, 10대의 마약 등을 열거했다. 그 다양한 진단에 ‘병든 약속’도 추가하길 권한다. 국민은 모르는 황당한 국민과의 약속, 그리고 그 악순환 말이다. 형사법 체계를 혼돈에 빠트린 검·경 수사권 조정, 에너지 위기를 자초한 탈원전, 국민 세금을 쏟아부어야 하는 한전 부실 등이 그 결과물이다.

이젠 뭔가 달라져야 한다. 약속이 신뢰로 이어지는 당위를 지켜야 한다. “국민 건강은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다. 정치 외교도, 경제 산업 정책도 모두 국민 건강 앞에는 후순위”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서열 정리가 ‘약속 정상화’의 단초가 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