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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정치권 주도 전기료 눈곱 인상에 한국 경제 골병든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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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전 역대급 부실 속 전기요금 8원 인상 그쳐

에너지값 결정에 정치 개입, 포퓰리즘 끊어야

정부가 오늘부터 전기요금을 ㎾h(킬로와트시)당 8원, 가스요금을 MJ(메가줄)당 1.04원 올리기로 했다. 4인 가구 기준으로 전기료는 월 3020원, 가스료는 월 4430원 오르게 된다. 혹독한 불황을 버텨내고 있는 중산층과 서민에겐 이마저도 적은 부담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인상분은 현재 한국전력과 가스공사의 천문학적 적자를 메우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한전은 2021년 이후 올 1분기까지 약 45조원의 손실을 냈다. 전기료를 인위적으로 누르면서 전력 구매 비용보다 판매가격이 낮아 전기를 팔수록 손해가 커졌다. 가스공사도 가스료 동결로 미수금(천연가스 수입대금 중 가스요금으로 회수되지 않은 금액)이 올 1분기 11조6000억원까지 늘어난 상태다. 정부가 뒤에 버티고 있는 공기업이었기에 망정이지 민간기업이면 망해도 벌써 망했을 상황이다.

비정상적으로 낮은 에너지 요금은 한국 경제 곳곳을 멍들게 하고 있다. 무엇보다 전력 과소비가 만연하면서 에너지 수입액이 급증해 무역수지 적자를 키우고 있다. 한전이 부족한 자금을 한전채 발행을 통해 조달하는 바람에 시중 금리를 끌어올려 기업과 가계에 큰 부담을 주고 있다. 게다가 한전의 전력망 투자마저 위축되면서 6500여 협력사 경영이 불안해지는 등 전력 생태계가 위협받고 있다.

이런 이유로 에너지 전문가들은 충분한 전기료 인상이 시급하다고 일관되게 요구해 왔다. 특히 3, 4분기에 냉방·난방 수요가 급증하고, 하반기부터 총선 정국이 펼쳐져 정치권의 눈치보기가 극심해질 것을 고려할 때 2분기를 전기료 인상 현실화의 최적기라고 촉구해 왔다. 그러나 올해 전기료는 이번 인상분 8원과 이미 1분기에 인상된 13.1원을 포함해 21.1원 인상에 그치고 말았다. 이는 한전 정상화에 필요한 인상분 52원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언 발에 오줌 누기’라는 평이 나오고, 한전 정상화가 물 건너갔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사안이 이렇게 왜곡된 것은 정치권의 과도한 개입 때문이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지난 3월 말 ‘여론 수렴 필요성’과 한전 자구 노력을 내세우며 전기요금 인상을 보류시켰다. 이번에도 ‘국민 눈높이’를 강조하며 인상 최소화를 주도했다. 국민의 눈을 가려 국민 세금으로 선심을 쓰겠다는 정치권의 생색내기 쇼가 따로 없을 것 같다. 공기업인 한전과 가스공사의 부실은 결국 국민 세금으로 메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 정권은 지금의 상황이 자신들이 비판해 온 전 정권의 ‘포퓰리즘’과 다를 바 없다는 지적을 아프게 새겨야 한다. 정치가 에너지 가격을 좌우할 수 없도록 전기위원회 독립성 강화 등의 실질적 조치가 절실하다는 사실이 이번에 더욱 명백해졌다. 이미 많은 선진국은 그렇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