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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법부는 중병 걸렸다" 법관대표회의 의장 쓴소리 [박성우의 사이드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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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박원규 대전지법 부장판사는 부드러운 말투와 온화한 미소의 소유자다. 법관보다는 성직자 같은 모습이다. 이렇게 순해서 사법행정의 난관을 헤쳐갈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박원규 전국법관대표회의 의장(대전지법 부장판사). 김성태 기자

박원규 전국법관대표회의 의장(대전지법 부장판사). 김성태 기자

그는 지난달 전국법관대표회의 의장으로 선출됐다. 일선 판사들의 대표다. 법관대표회의는 2017년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후 상설화됐다. 김 대법원장 임기 중반인 2021년 무렵까지는 대법원장을 옹호하고 특정 이념성향을 띤다고 해서 논란이었다. 반면 박 부장판사는 이념 성향은커녕, 지금까지 법원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마저 주저해왔다.

그런 사람이 선뜻 법관대표회의 의장에 도전한 배경이 궁금했다. 지난 2일 박 부장판사를 대전지법에서 만났다. 그는 “현재 사법부가 중병에 걸렸다”고 진단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로 ‘재판 지연’을 꼽았다.

전국법관대표회의 의장에 도전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다들 고사했다고 하던데요.
솔직히 의장이 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고, 제가 평소에 의견 표출을 적극적으로 하는 편도 아닙니다. 아마 주변에서 지방법원 부장판사 중에 연차가 제일 높은 축에 속한다는 이유 등으로 천거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의장으로서 포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 사법부가 굉장히 위기 상황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판사님들을 만나봐도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사법부의 위기는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부분이어서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특히 어떤 부분이 위기라고 보시나요.
재판 지연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고 봅니다. 제가 2014년에 사법정책연구원에 있을 때만 해도 적어도 성과적인 측면에서 사법부가 굉장히 훌륭했어요. 그런데 예를 들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를 폐지하면서 법원의 인재들이 대거 조기에 법원을 떠나고 있습니다. 고등부장 승진제 폐지는 사법부 민주화 측면에서 긍정적인 부분이 있지만, 아무런 대책 없이 하루아침에 제도를 없애버리니 판사가 부족하고, 재판의 효율성 측면에서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고등부장 승진제’는 판사 경력 20년 차 정도 되는 지방법원 부장판사를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시켜 행정부의 차관급 대우를 해주는 제도였다. 판사들에게 사명감을 심어주고, 건전한 경쟁이 효율적인 재판 사무처리를 독려한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법관의 관료화’를 부추긴다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2020년 3월 법원조직법 개정과 함께 없어졌다.

사법부가 사람으로 따지면 중병에 걸렸는데, 그 증상들이 재판 지연 같은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죠. 또 국민이 일부 민감한 사건 판결에 대해 불신을 하거나 사법부를 공격하기도 하잖아요. 저는 이런 것들이 다 병의 증상이라고 보는데, 근본적인 병의 원인은 국민이 사법부에 대해서 신뢰를 안 하게 됐다는 것이죠.

재판 지연 문제에 현재 사법부의 문제가 응축돼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고등부장 제도’를 되살리기는 어렵지 않은가요.
다음 대법원장님의 의지에 달렸지만, 꼭 고등부장 제도를 되살리는 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재판도 하나의 시스템입니다. 인적 물적 자원을 충원하고, 재판이라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거기서 나오는 성과, 이렇게 세 단계로 나눠볼 수 있는데요. 충원 쪽은 아무 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스템 자체를 흔들어 버렸으니 문제가 생기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합니다. 
의장님이 생각하는 해법은 뭔가요.  
일과 가정의 양립, 이른바 ‘워라밸’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았고, 법관 충원 방식도 크게 바뀌었습니다. 또 평생법관제가 정착하면서 판사의 라이프 사이클도 바뀌었죠. 전자소송이 활성화하면서 기록이 두 배 이상 많아졌고, 옛날 같으면 증거 철회도 재판장 재량으로 할 수 있었지만, 요즘은 변호인 입장도 있고 해서 여의치 않습니다.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사건도 계속 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록이 두 배가 되면 판사들은 일하는 시간이 두 배가 되는 게 아니라 4배가 될 수도 있어요. 제가 통계를 뽑아보니 접수된 사건 수는 민·형사 통틀어 다 줄었더라고요. 최근 몇 년새 사건 수는 줄고 있는데 일선에서 판사들이 느끼는 업무량은 폭증하고 있거든요. 사건이 그만큼 복잡하고 어려워진 거예요.  
그렇다면 인적 물적 투입을 늘려야 하는데 지난 2년간 사법행정을 담당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무기력하셨던 것 같아요. 투입을 늘려가면서 제도 개선을 점진적으로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 많이 듭니다.
구체적인 해법으로는 판사 처우 개선, 재판연구원 대폭 증원, 시니어 법관제 도입을 들 수 있고, 이 세 가지 제도가 동시에 이뤄져야 효과가 극대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우 개선은 지금과 같은 대량 사직을 방지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판사들은 ‘올라운드 플레이어’인데 재판은 협업입니다. 재판연구원이 현재 350명 정원으로 돼 있는데 한 1000명까지 늘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고령 판사들이 늘고 있어 이들을 지혜롭게 활용하는 방안도 필요합니다.
일반 국민은 판사들의 정치 성향에 대해서 우려하기도 하는데요.
우리 헌법에 판사는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돼 있습니다. 예전에 사법시험 공부하면서 참 멋진 말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요. 중요한 것은 이 ‘양심’이라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판사도 인간이기 때문에 정치적 의견을 가질 수 있지만 그걸 판결로 드러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성향이나 주관적인 소신을 ‘법관의 양심’이라는 말로 합리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그것이 국민의 신뢰를 얻고 사법부 독립을 지키는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정치의 영역에서 해결돼야 할 문제가 사법부의 판단에 맡겨지는 ‘정치의 사법화 현상’도 문제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법관이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해관계의 중심에 서는 일이 많아지고, 공정성과 중립성을 의심받는 경우도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초기 법관대표회의의 책임도 있다고 봅니다.  

2018~2019년 법관대표회의 의장을 지낸 최기상 전 부장판사는 민주당 공천을 받아 2020년 21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됐다. 2019~2021년 의장을 지낸 오재성 현 전주지방법원장은 우리법연구회 회장 출신이다.

결과적으로 국민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걸 존중해야 하는 거고, 불신을 해소할 방안에 대해 사법부 내에서도 좀 검토하고 제도도 마련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판사가 어떤 직업이라고 생각하세요.
국민은 판사가 진실을 발견해 주기를 기대하지만, 판사는 사실 객관적 진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증거에 의해서 인정된 사실을 전제로 판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객관적 진실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사건 당사자죠. 그래서 판사는 자기가 맡은 재판에 대해서 당사자로부터 심판을 받는 숙명을 지닙니다. 그래서 판사는 ‘자기 확신’보다는 ‘성실과 겸손’이 요구되는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판사로 살아오면서 특별히 보람을 느꼈던 일이 있었나요.
제가 1997년에 판사가 됐으니 27년째 판사를 하고 있는데요. 예전에 어느 지방 법원에 있을 때 사무관 시험에 합격한 직원이 그 법원에서 딱 한 분뿐인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를 포함해서 몇 명의 판사들이 퇴근하고 공부를 도와드렸어요. 그랬더니 이듬해 무려 일곱 분이나 합격했고, 함께 축하한 기억이 있습니다. 합격한 직원이 “이번에도 떨어졌으면 정말 가족들 볼 낯이 없을 뻔했다” 하시는데 서로 울컥했죠. 또 2020년에 국내 최초로 ‘민사 국제재판’을 한 일도 생각나네요.

박 부장판사는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권형(權衡)’이라고 했다. 예기(禮記) 심의편에 나오는 말로 사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뤄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게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사이드바(sidebar)는 미국 법정에서 판사가 재판 진행 상황에 대해 할 말이 있을 때, 또는 검사나 변호인이 배심원들을 피해 판사에게 직접 얘기하고 싶을 때, 법대 앞에 모여 논의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문업계 용어로는 메인 기사 옆에 붙는 ‘해설 박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판사·검사·변호사 뿐 아니라 사건 관계인도 열심히 만나고 와서 열심히 해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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