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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찬호의 시선

5·18 기념일 제정한 대통령은 DJ가 아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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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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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총선에서 김대중이 이끄는 평화민주당이 호남을 석권한 이래 35년간 이어진 민주당의 호남 패권이 흔들리고 있다. 이 당의 현직 대표와 직전 대표가 사법리스크에 휘말리면서 당 전체 이미지가 추락한 탓은 아니다. 호남 민심이 민주당의 추문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오히려 “국민의힘은 뭐 잘했나. 거기는 문제 없나”는 반문이 돌아온다.

민주당의 호남 패권이 흔들리는 이유는 따로 있다. “저 당 30년 넘게 밀어줬는데 살림살이 나아진 것 하나 있었느냐”는 회의가 그거다. 이 회의는 20~30대에서 뚜렷하다. 1980년 ‘광주’와 김대중을 겪은 기억이 없는 2030은 이념 아닌 실용이 투표 기준이다. “민주당 찍으면 쇼핑몰 하나 없는 광주 상황이 달라지느냐”가 이들의 생각이다. 중장년층에서도 비(非) 민주당 정서는 확산하고 있다. 4·7 전주 재보선에서 진보당 후보가 압승했다. 민주당이 무공천한 결과라고 보면 오산이다. 골수 민주당 출신으로 “당선되면 민주당 복당”을 공약했던 무소속 후보가 전주에 연고도 없던 군소 정당 후보에게 참패했다. “국민의힘은 싫지만 민주당도 찍을 마음 없다”는 민심이 드러난 거다.

툭하면 불거지는 여권 ‘5·18 폄하’
국가기념일 제정한 YS 부정한 셈
호남의 ‘비민주당’ 정서 확산 주목

지난해 6·1 지방선거에서 전남은 22개 기초단체장 가운데 7개를 무소속 후보에게 안겨줬다. 목포는 무소속 후보(57%)가 민주당 후보(37%)를 20%p차로 눌렀다. 목포 사상 초유의 일이다. 이 선거에서 광주의 투표율은 37.7%로 전국 최저를 기록했다. 8·28 민주당 전당대회의 광주 투표율도 34.18%에 그쳤다. “처참하게 낮은 투표율”이란 곡소리가 민주당에서 나왔다.

반면 국민의힘은 6·1 지방선거에서 광주시장과 전남·북지사 후보 전원이 15% 이상 득표해 법정 선거비 전액을 보전받았다. 초유의 일이다. 이정현 전남지사 후보가 18.81%, 조배숙 전북지사 후보가 17.88%을 득표했다. 정치인생 40년 내내 호남에서만 출마한 이정현 후보의 말이다. “‘농도(農道)’로 불리는 호남에 농기계 공단, 농약 공장 하나 없다. 품종 연구소도, 농축수산물 가공단지도 없다. 35년간 호남을 지배해온 민주당이 조금이라도 호남 경제에 관심이 있었다면 이런 불모지가 되진 않았을 거다. 3년전 전남도가 일자리 27만개가 보장된 방사광 가속기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250만 주민이 서명 운동을 벌이며 올인했지만 방사광 가속기는 경북 포항에 갔다. 당시 대통령은 문재인이었고, 총리는 호남 출신 정세균이었고, 집권당은 민주당이었다.”

총선까지 1년이 남았다. 정치가 뒤집어져도 몇 번은 뒤집어질 기간이다. 여권은 ‘호남 포기’를 포기해야 한다. 지명도 높은 인재를 서너명이라도 공천하는 것이 여당이자 전국정당으로서의 책무다. 호남 무공천은 총선 포기와 동의어다. 호남에 공천한 후보가 패배하면, 다른 자리에서 일할 기회를 줘야 한다. 험지 출마의 공을 배려해야 그 다음 총선에서도 인재들이 호남에 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인재들의 호남 출마가 상수가 되면, 호남 민심도 결국 마음을 열게 될 것이다. ‘호남을 포기하니까 인재가 안 오고, 인재가 안 오니까 안 찍고, 안 찍으니까 또 포기하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여권은 5·18에 대해서도 성찰해야 한다. 호남은 보수 정당에 대한 신뢰가 낮다. 김재원 최고위원의 ‘5·18 폄하’ 발언은 호남이 여당에 털끝만큼 줬던 신뢰마저 거둬들이는 계기였다. 그런데, 5·18을 국가법정기념일로 제정한 대통령이 누구였나. 김대중이 아니었다. 김영삼(1997년)이었다. 5·18의 의미를 국가적으로 공식화한 대통령은 국민의힘 선배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5·18 정신 헌법 수록’을 대선 공약에 넣은 것도 그런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 최고위원의 발언은 자신이 속한 정당의 가치와 전통을 부정한 자가당착으로 징계 받아 마땅하다. 다음주 광주에서 치러질 5·18 기념식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국민의힘 의원 전원과 내각, 대통령실 비서진이 총출동한다고 한다. 5·18의 역사적 의미를 공식화한 당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이 모습이 윤 대통령 임기 내내 이어지기 바란다.

그러나 호남을 5·18에 가둬선 안 된다. 진짜 추모는 어려운 호남 경제를 살리는 거다. 호남은 내년 총선에서 5·18을 넘어 ‘지속 가능하게 잘 사는 호남’을 만들어줄 정당이 누구냐고 물을 것이다. 국민의힘이 이 질문에 답을 내놓으려면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제일 중요한 게 양질의 일자리다. 양질의 일자리는 대기업이 쥐고 있다. 대기업이 호남에 올 방책을 제시해야 한다. 보수 정당이 호남의 삶을 얼마나 윤택하게 바꿀 수 있는지 보여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