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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막서 잘 안나가요”…민노총간부-북 연락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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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이 오토바이는 오르막길에서 잘 나가지 않네요.” 2022년 8월, 오토바이 열쇠 없이 시동을 거는 방법을 설명하는 한 유튜브 동영상의 댓글에 달린 덧댓글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 조직실장을 지낸 김모(48)씨가 북한 문화교류국 공작원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암호 키 훼손으로 교신이 원활하지 않자, 북한 문화교류국은 베트남에서 김씨와 접선을 시도했다. 북한 공작원은 접선 가능 여부를 묻기 위해 지령문으로 동영상 제목과 링크를 보냈다. 접선이 가능하면 ‘토미홀’, 불가능하면 ‘오르막길’을 댓글에 넣으라고 했다. 검찰 관계자는 “겉으로는 아무런 대공 용의점이 드러나지 않는 영상과 댓글이었다. 지령문을 찾지 못했다면 알 수 없었을 것”이라며 “유튜브 댓글로 북한 공작원과 통신한 사례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수원지검 공공수사부(부장 정원두)는 북한 지령을 받아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등 국가보안법 위반(간첩, 특수잠입·탈출, 회합·통신, 편의제공 등) 혐의로 김씨와 민주노총 조직쟁의국장 출신으로 총책 격인 석모(52)씨, 민주노총 산하 전 금속노조 부위원장 양모(54)씨, 제주평화쉼터 대표 신모(51)씨 등 4명을 구속기소했다고 10일 밝혔다. 검찰은 지난 1월 민주노총 본부 압수수색 중 석씨가 보관하던 암호 키를 확보해 지령문 90건과 보고문 24건을 파악했다. 역대 가장 많은 지령문·보고문이 확보된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이라고 검찰은 설명했다.

북한은 석씨에 대해 “20년 넘게 혈육의 정을 나누었다”고 표현할 만큼 각별한 사이임을 강조했다. 석씨는 2017년 9월 캄보디아, 2018년 9월 중국, 2019년 8월 베트남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했다. 이들은 접선 장소·시간뿐 아니라, ‘계단에서 대기하다가 정각에 손에 들고 있는 생수병을 열고 마시는 동작’ ‘손에 들고 있는 선글라스를 손수건으로 2~3차례 닦는 동작’ 등 수신호까지 미리 약속해 만났다. 석씨는 2018년 10월~지난해 12월 102회에 걸쳐 지령문을 받았고, 민주노총 내부 통신망 아이디와 비밀번호 등이 기재된 대북 보고문 등을 전달했다.

지령문에 따르면 북한 문화교류국은 본사, 석씨가 이끈 조직은 지사, 민주노총은 영업1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총회장님으로 표기됐다. 지사장 격인 석씨는 민주노총 내 지하조직 구축과 간부 포섭 등의 활동을 했다. 석씨에게 포섭된 김씨는 2017년 9월 캄보디아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했고, 2018년 4월부터 북한 지령에 따라 강원조직의 지사장을 맡아 별도 조직도 구축했다.

북한은 석씨 등에게 민주노총 내부 동향 보고와 민족해방(NL) 계열 경기동부연합 출신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 당선 지지, 산별노조 장악 등을 요구했다. 북한은 또 청와대 등 주요 국가기관의 송전선망 자료, 평택 화력·LNG 저장탱크 배치도 등의 수집도 지시했다.

민노총 “현 정권, 노동자 권리 지킬수 없다” 윤 대통령 퇴진투쟁 선포

검찰은 석씨 사무실 PC에서 평택 미군기지·오산 공군기지 등 군사시설과 군용장비에 관한 동영상도 확보했다.

북한은 주요 사회 이슈에 맞춰 반정부 투쟁, 반미·반일감정 조장 등 민주노총을 정치투쟁 선동에 동원하라고 주문했다. 지난해 10월 이태원 참사 이후에는 촛불시위와 추모문화제 등으로 반정부 시위를, 지난해 12월 화물연대 총파업 후에는 대정부 투쟁을 이어가라는 지령을 내렸다. 검찰 관계자는 “(피의자들은) 국내 최대 노동단체를 외피로 삼아 근로조건 개선이 아닌 북한 지령에 따른 정치투쟁 등에 집중하도록 주도한 것”이라며 “민주노총에 침투한 지하조직이 저지른 반국가적 범죄의 전모를 철저히 규명해 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민주노총은 윤석열 대통령 취임 1주년인 이날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북문에서 결의대회를 열고 “윤 대통령 퇴진 투쟁에 나선다”고 발표했다. 민주노총은 “(현 정권은) 국민의 기본권과 생명, 국가의 자주성과 평화를 지킬 의지와 능력이 없다는 것이 확인됐다”며 “이 정권을 그대로 두고서는 노동자 권리도, 민중 생존권도, 한반도 평화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집회 후 서울역을 거쳐 서울시청까지 행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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