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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째 의자뺏기 싸움…매일 경찰서 출근하는 현대차 직원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4일 국가인권위원회가 서울 서초경찰서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특정 단체가 집회 장소를 선점하는 ‘집회 알박기’로 후순위 집회자의 권리가 침해받지 않도록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권고했지만, 서초서가 “이미 선·후순위 집회 모두 온전히 보장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적극 대응했다”며 권고를 수용하지 않았다고 밝히자 나온 반응이었다.

 지난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현대자동차 인근 인도에 기아자동차 대리점 해직노동자 박미희(62)씨의 텐트가 플래카드와 함께 서 있다.

지난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현대자동차 인근 인도에 기아자동차 대리점 해직노동자 박미희(62)씨의 텐트가 플래카드와 함께 서 있다.

문제의 장소는 10년 넘게 집회 신고를 둘러싸고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서울 서초구의 현대자동차 본사 앞이다. 인권위의 입장이 나온 4일에도 이곳에선 본사 건물 모퉁이를 기준으로 사측이 신고한 집회의 참가자들, 그리고 천막을 설치하고 농성을 벌이고 있는 기아차 해고 노동자 박미희(62)씨가 대립하고 있었다.

양측 간 갈등은 박씨가 1인 시위를 위해 상경한 10년 전 시작됐다. 기아차의 위탁을 받아 개인 점주가 운영하는 대리점에서 일한 박씨는 지난 2013년 4월 부산 지역 대리점 대표들의 부당 판매 행위를 본사에 내부 고발했고, 같은 해 5월 30일 점주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이후 그는 부당 해고를 주장하며 현대차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다. 박씨는 “사측의 사과와 원직 복귀가 투쟁의 마무리”라고 했지만, 현대차 측은 “박씨는 대리점 대표와 계약을 맺었지 기아차와 직접적인 고용 관계가 아니므로 박씨의 복직과 회사는 무관하다”고 맞섰다. 양측 모두 10년째 같은 입장이다.

이에 따라 약 10년 동안 현대차 직원들은 거의 매일 아침 30일 뒤에 있을 집회를 위해 서초서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 집회를 하려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에 따라 720시간(30일) 전부터 48시간 전 사이에 관할 경찰서에 직접 방문해 신고를 해야 한다. 박씨는 “처음엔 며칠이면 시위를 끝낼 수 있을 줄 알고, 비어 있던 친척 집에 잠시 머물려 했다”고 했다. 그러나 시위는 끝 없이 길어졌고, 박씨는 경기도 성남시에 집을 구해 매일 현대차 본사 앞으로 출근하고 있다. 햇빛을 막기 위한 파라솔만 있던 이곳은 3년 전 쯤부터 천막 농성장으로 변했다.

10년 넘게 이어진 ‘의자 뺏기’ 싸움…좁혀지지 않는 간극

지난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현대자동차 사옥 근처에서 현대자동차 측에서 주최한 집회가 열리고 있다. 최서인 기자

지난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현대자동차 사옥 근처에서 현대자동차 측에서 주최한 집회가 열리고 있다. 최서인 기자

 박씨와의 대립은 10년째지만, 사실 현대차 직원들이 매일 서초서로 출근해 집회 신고를 시작한 건 더 오래전인 2010년 부터다. 서초서와 현대차 등에 따르면, 사측은 지난 2010년부터 본사 앞에서 ‘기업·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건전한 집회문화 정책 촉구대회’를 열겠다고 신고했다. 같은 장소에 2개 이상의 집회·시위가 신고될 경우 선순위 신고자가 우선 보호받기 때문에, 확실한 선순위가 되기 위해 직원들이 번갈아 가며 경찰서로 출근한 것이다. 서초서 관계자는 “대기업 주변엔 항상 민원성 집회가 있으니까 박씨가 등장하기 전에도 현대차 측에서 본사 주변의 집회 신고를 계속 해왔다”고 말했다.

현대차 본사 앞에서 반복되는 이 같은 ‘의자 뺏기’ 싸움은 결국 수차례의 인권위 진정과 소송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해결의 실마리는 찾지 못하고 있다. 인권위는 관련 진정에 대해 “경찰이 (박씨 측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했으며, 현대차 측 집회 참여자들의 위법한 자력구제 행위에 대해 엄격히 지도하고 제재할 필요가 있었다”고 밝히며 박씨 손을 들어줬지만, 2019년 11월 사측이 박씨를 대상으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의 1·2심에선 박씨가 패소했다. 법원은 박씨가 현대차와 기아차에 각 500만원씩 지급하라고 판결했고, 박씨가 상고하며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양측의 입장차 역시 전혀 좁혀지지 않고 있다. 박씨는 “집회를 하려 하면 사측 사람들이 나타나서 못하게 막는다. 집회의 자유를 보장 받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현대차 측은 업무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반복되는 본사 앞 항의 집회에 대응하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없다는 입장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사옥 주변에서 여러 사람들의 집회·시위가 반복된다. 회사는 집회·시위의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집회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녀상·이태원광장에서도 논란된 ‘중복 집회’… 경찰 골머리

중복 집회 문제는 경찰의 오랜 난제 중 하나다.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인근에서도 정의기억연대가 매주 수요시위를 열고, 엄마부대 등 보수 단체는 이에 대해 맞불 집회를 연다. 때문에 양측도 집회 신고를 두고 매번 다툰다. 지난해 9월 추석 연휴에는 선순위단체인 신자유연대와 소녀상을 지키고 있던 반일행동 관계자들이 물리적으로 충돌하며 부상자도 발생했다. 또 지난해 12월 이태원광장에서는 유가족들이 이태원 참사 희생자 시민분향소를 설치하려던 장소에 보수 단체인 신자유연대가 먼저 집회 신고를 하며 분향소 설치를 막아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지난해 9월 11일 밤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인근에서 신자유연대 회원들과 반일행동 회원들이 뒤엉켜 있다. 집회 선순위단체인 신자유연대가 정의기억연대 해체 등을 촉구하는 집회를 여는 과정에서 소녀상을 지키고 있던 반일행동 관계자들과 충돌했다. 연합뉴스

지난해 9월 11일 밤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인근에서 신자유연대 회원들과 반일행동 회원들이 뒤엉켜 있다. 집회 선순위단체인 신자유연대가 정의기억연대 해체 등을 촉구하는 집회를 여는 과정에서 소녀상을 지키고 있던 반일행동 관계자들과 충돌했다. 연합뉴스

곳곳에서 비슷한 문제가 불거지고, 다른 집회를 막을 목적으로 먼저 집회 신고를 하는 행위가 부당한 ‘알박기’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도 계속되자 가장 난감해 하는 건 집회를 관리하는 경찰이다. 골머리를 앓던 경찰청은 지난해 4월 ‘중복집회의 평화적 관리를 위한 입법 개선 방안 연구 용역’을 진행해 지난해 11월 결과를 받았다. 용혜인 의원실이 제출 받은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연구팀은 “집시법을 개정해 중복 집회의 시간 또는 장소의 분할 개최를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을 경찰에 부여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행법상 경찰은 분할 개최를 ‘권유’할 수 있고 이를 받아들일지는 집회 주최자의 결정에 달렸는데, 법을 바꿔 경찰에게 더 강한 권한을 부여하자는 것이다.

반면 경찰의 개입이 답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결국 대화로 해결할 문제라는 것이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사법대학 교수는 “경찰이 사측을 제지하라는 인권위의 요구는 무리한 것이다. 집회에는 우선순위가 있고 경찰이 한쪽 편을 들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상대를 인정하고 타협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중재와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가는 게 근본적 해결”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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