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풀리기 기다리다 시장 다 뺏겨, 해외 나가거나 IP 판매뿐 [낡은 규제에 발목 잡힌 K스타트업]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838호 04면

SPECIAL REPORT

오준호 오톰 대표가 자사 제품인 휴대용 X-레이 장비 ‘마인’을 시연하고 있다. 장정필 객원기자

오준호 오톰 대표가 자사 제품인 휴대용 X-레이 장비 ‘마인’을 시연하고 있다. 장정필 객원기자

지난달 28일 찾은 광주광역시 북구에 위치한 휴대용 X레이 장비 제조업체 오톰 공장에선 생산을 마친 제품들이 한켠에 쌓여 출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회사에서 만든 휴대용 X레이 장비인 ‘마인’ 제품은 폴라로이드카메라 정도의 크기로 휴대가 편리한 데다, 피사체를 제외한 5면의 방사선 피폭량이 제로(0)에 가까워 별도의 차폐실(전자파·방산선 등이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차단 시설)이 필요 없다는 게 특징이다. 덕분에 의사 혼자 진료하는 소규모 병원이 많은 미국이나 유럽에서 주목받는 기술이다. 국내에서도 코로나19가 한창 맹위를 떨치던 2020년께 감염병의 최전방에서 활약했다. 오준호 오톰 대표는 “당시에도 정부에선 임시허가를 내주진 않았지만, 감염병 억제가 시급했기에 전국의 임시 선별진료소에 우선적으로 보급됐다”고 회상했다.

미국·인도 등서 새 장비 장점 먼저 인정

이때까지만 해도 장밋빛 미래가 예견됐던 이 회사의 지난해 연간 매출은 25억원에 그친다. 이것도 기존 X레이 장비 대비 장점을 인정한 미국과 인도 등에서 매출이 터진 덕분이다. 같은 제품의 성능이 국내라고 다를 리 없겠지만, 국내에선 규제에 막혀 사실상 활용이 어려운 상황이다. 병원이나 보건소 등 실내에서 사용하던 기존의 덩치 큰 X레이 장비와 달리 휴대용 X레이 장비를 주로 필요로 하는 곳은 야외 인명 구조 현장인데, 현행법에선 응급구조사나 소방대원은 X레이 장비를 활용할 수 없다. 방사선 피폭 위험 때문에 의사나 방사선사 등 전문가만 X레이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규정 때문이다. 낡은 규정이 저선량 신기술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규제 때문에 국내 사업을 접고 해외로 떠나는 경우도 다반사다. 오토바이용 광고판 제조 및 광고플랫폼 서비스 스타트업 뉴코애드윈드는 국내 사업을 사실상 접고 딜리버리히어로와 UAE(아랍에미리트연합) 시장으로 떠날 뻔했다. 이 회사는 오토바이 배달통에 적합한 저전력 광고판을 제조하는 회사다. 시인성이 좋지만 눈부시지 않은 화면을 구현하는 기술도 보유했다. 그러나 국내에선 오토바이에 광고를 붙이는 게 불법이다. 이에 지난 2019년 5월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실증특례를 받았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장민우 뉴코애드윈드 대표는 “제조라인을 까는데 30억원이 들어가는데 실증특례로 사업을 할 수 있게 허용해준 게 고작 100대라 이걸 갖고 투자를 받을 방법이 없다”며 “국내에선 규제 개선 속도가 너무 느려 자본금이 풍부하지 않은 스타트업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관련기사

그나마 해외 시장을 두드릴 수 있는 회사는 다행이다. 비대면 원격 진료 서비스 분야 스타트업은 대부분 사업을 접을 판이다. 코로나19 확산으로 한시적으로 허용됐던 비대면 진료가 이달 중 종료되는데, 비대면 진료를 허용할 법안의 입법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사이에선 코로나19로 안전성과 효율성이 입증된 비대면 원격진료 서비스를 해묵은 규제가 발목 잡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에 국회에선 지난달 말 비대면 진료 관련 의료법 개정안을 논의하기도 했으나 소득이 없었다. 장지호 원격의료산업협의회 공동회장(닥터나우 대표)은 “만 3년간 1300만 명이 3700만 건의 진료를 받은 비대면 진료 서비스가 복지위 소위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사라질 위기”라며 “새로운 법안이 발의된 상황에서도 국회에선 논의조차 하지 않은 건 직무유기”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스타트업 사이에선 국내 시장은 유니콘이 나오기 어려운 척박한 토양이란 지적이 다시 회자하고 있다. ‘네카라쿠배’(네이버·카카오·라인·쿠팡·배달의민족)로 불리는 토종 유니콘의 성공에 한때 잊히긴 했지만 한국은 규제를 풀기 어려워 유니콘 불모지란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아산나눔재단에서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100대 유니콘 가운데 12곳은 한국에서 사업이 불가능하고, 43곳은 제한적으로만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00대 유니콘의 절반가량인 55개 기업이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했다면 규제에 막혀 유니콘으로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란 얘기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이 때문에 매 정부마다 규제 개선에 두 팔을 걷어붙였지만, 실효성이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예컨대 지난 2019년 도입된 규제 샌스박스만 하더라도 희망고문일 뿐이란 지적까지 나온다. 규제 샌드박스는 신기술을 활용한 사업이 현행 규제에 막힐 경우, 한시적으로 규제를 유예해 임시허가를 발급하고 시장 테스트 기회를 제공하는 제도다. 구태언 법무법인 린 파트너 변호사(테크앤로벤처스 CVO)는 “지난 정부에선 규제 개선이 더디자 관련 법을 고쳐 규제 샌드박스를 통한 조치를 계속 연장해주도록 했지만 임기응변일 뿐”이라고 말했다. 규제 샌드박스 조치를 연장할 때마다 조건이 달라질 수 있는 데다 사업 규모에도 제한이 있어 제대로 사업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구 변호사는 “규제가 개선될 것이란 기대가 없었다면 처음부터 다른 사업을 했을 것이란 한탄이 스타트업 대표들 사이에서 종종 나온다”며 “실질적인 규제 개선 없이 연장 조치만 무제한적으로 늘린 건 스타트업이 망할 때까지 희망 고문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의 핀테크 서비스에 수십 개 조건

실제로 실생활과 밀접해 다양한 기관의 규제를 받는 핀테크 분야에선 하나의 서비스에 수십 개의 조건이 붙는 게 부지기수다. ‘스마트폰을 활용한 신용카드 결제 서비스’로 애플의 선택을 받은 한국NFC만 하더라도 올해 혁신 금융서비스 지정이 연장되긴 했지만, 부가조건이 19개로 늘었다. 부가조건은 ‘1회 30만원 이상의 거래를 할 경우에는 거래 전에 고객의 영업 지속 여부를 미리 확인해야 한다’는 식이다. 황승익 한국NFC 대표는 “4년간 테스트를 해보니 가장 많이 쓰는 분들이 수확기 산지 직송 판매를 하는 농민들이었는데, 1년에 한철 판매에 나서는 농민들에게 영업 지속 여부를 일일이 확인한다면 귀찮아서라도 이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억울하더라도 애플과 특허권 사용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면 국내 시장에서 버텨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특허 기반 핀테크 스타트업들도 국내를 포기하긴 어려운 처지다. 본진인 국내 시장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기술이란 꼬리표가 붙어 제값받기 어려운 탓이다. 비자와 마스타, 유니온페이 등 글로벌 결제 업체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지만, 잘못된 규제 적용으로 회사를 매각할 수밖에 없었던 핀테크 스타트업 페이콕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회사는 하드웨어인 CPU에 보안 구역을 설정하는 기술을 확보한 곳으로, 미 국방부에 들어가는 스마트폰에 이 기술이 적용된다. 그러나 국내에선 잘못된 규제에 시장에서 밀려났다. 권해원 페이콕 창업자는 “페이팔이 투자자로 있는 사모펀드에 매각할 수 있었지만 매각 대금은 연구개발비만 겨우 회수하는 수준이었다”며 “규제 샌드박스가 만들어진 취지를 살리고 열매를 맺도록 해야 페이콕 같은 회사가 다시 안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부처 사이의 컨트롤타워가 없다는 것도 애로사항으로 꼽힌다. 스타트업 사이에선 규제 사안을 두고 구분이 모호할 경우, 어떤 기관이 담당할지는 기관 판단에 따라 결정된다는 게 정설로 통한다. 기업 입장에선 규제에 따라 다양한 부처를 찾아다니며 대응해야 한다는 얘기다. 사공이 많다보니 운 좋게 규제가 개선되더라도 일부 스타트업에겐 또 다른 규제로 작용할 여지가 크다는 지적이다. 이기대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장은 “일본에서도 10여년 전 비슷한 문제로 암반규제(巖盤規制)가 문제가 되던 당시 아베 총리가 직접 규제 개선 위원장을 맡아 콘트롤타워 역할을 한 바 있다”며 “국내에서도 관계부처 합동으로 다양한 위원회가 작동하고 있지만, 종합적인 이해관계 조정을 위해서라도 대통령이 직접 참여하는 규제 개선 기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국 의사 85% 비대면 원격진료 활용…경쟁 관계라도 새로운 기술 적극 도입

스타트업 아디옌으로 결제 플랫폼 제공자를 바꾼 이베이. [뉴스1]

스타트업 아디옌으로 결제 플랫폼 제공자를 바꾼 이베이. [뉴스1]

85%. 미국 의사협회 설문조사에 참여한 의사 2232명 가운데 비대면 원격진료를 활용하고 있다고 밝힌 응답자 비율이다. 활용 여부와 상관없이 59.5%의 응답자는 원격진료가 양질의 진료를 제공할 수 있다고 응답했다. 기술의 발전으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진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비대면 원격진료가 대면 진료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진료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스타트업들이 내놓는 신기술을 두고 갈등을 빚기보단 전문직의 도구로 여기는 분위기는 법적 규제에서도 드러난다. 원격진료만 하더라도 미국 연방법에선 금지하는 내용이 없다. 다만, 의사 면허를 따면 국내 어디에서든 진료가 가능한 한국과 달리 주별로 의료면허 자격이 상이하고, 서로 다른 지역의 의료보험 적용을 어떻게 할지를 정하느라 공백이 있었다. 코로나19 확산에 미국 정부는 서로 다른 주 사이의 원격진료를 한시적으로 허용한 바 있다.

미국도 이달 세계보건기구(WHO)의 ‘코로나19 비상 상태’ 해제를 앞둔 상황이지만, 의회에선 코로나19로 인해 도입된 원격진료 조항을 2024년 12월 31일까지 연장하기로 한 상태다. 원격진료를 지지하는 초당파 의원들은 바이든 대통령에게 서한을 통해 “외진 곳이나 의료 서비스가 부족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치료를 필요한 시간과 장소에서 받을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루가 다르게 신기술이 나오는 핀테크 분야도 마찬가지다. 더 나은 기술이라면 자사 기술을 대체하는 것도 꺼리지 않는다. 예컨대 세계 최대 오픈마켓인 이베이는 2018년 결제 플랫폼 제공자를 페이팔에서 네덜란드의 스타트업 아디옌으로 교체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페이팔은 이베이가 2002년 15억 달러라는 거금을 들여 인수한 업체다. 그러나 결제 수수료가 낮은 아디옌을 주거래 시스템으로 선정했다. 반면, 페이팔은 올해 7월을 마지막으로 이베이에서 더는 이용할 수 없게 된다. 소비자 보호나 비용 감소 등에 유리한 신기술이 있다면 활용에 적극적인 셈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