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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이 10년 괴롭힌 병 실체 찾았다…그 뒤엔 '이건희 3000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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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열 살 지연이(가명)는 올해 어린이날에도 특별한 계획이 딱히 없었다. 잘 넘어지고 숟가락을 잘 떨어뜨릴 만큼 근육 힘이 약해 친구들과 어울려 놀지 못했다. 생후 100일 무렵부터 목을 잘 가누지 못했고, 또래가 걷기 시작할 즈음엔 잘 서지 못하는 증세로 이어졌다. 원인을 알지 못했다. 그냥 ‘희귀병’ 환자였다. 그런 지연이 가족에게 지난 2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 희귀병이 ‘세가와병’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그 치료 길이 함께 열렸다. 지연이 엄마는 이제 “내년 어린이날은 다를 것 같다”며 희망을 얘기한다.

세가와병은 특정 유전자 이상으로 뇌의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는 병이다. 전국에 환자가 몇 명인지는 알 수 없고, 유병자가 200명 이하라 극희귀질환이다. 특히 지연이 증세는 세가와병 중에도 매우 드문 유형이라고 한다. 앞서 지연이 가족은 병명을 알기 위해 전국 유명 병원은 다 찾아다녔다. 자기공명영상촬영(MRI)과 컴퓨터 단층촬영(CT) 등 온갖 검사를 다 받았지만 “뇌병변이 의심된다” 정도의 소견만 받았다. 지역 대학병원에서 100만원을 내고 받은 유전자 검사도 소용이 없었다.

10년간 찾아다닌 ‘상세불명 질환’의 정체를 알게 된 건 서울대병원의 유전체 분석 검사를 통해서다. 검사를 받게 된 것도 이를 권유하고 그 결과를 정확히 해석한 의료진 덕분이다. 그 이면에는 ‘사건’이 있었다. 고 이건희 회장 유족이 2021년 소아암과 소아 희귀질환을 앓는 어린이 환자를 위해 쓰라며 서울대병원에 3000억원을 기부한 일이다.

기부금을 의미 있게 사용하기 위한 ‘키’는 서울대병원이 잡았다. 전국 주요 어린이병원과 어떻게 나눠 써야 유족 뜻대로 소아 환자들에게 고른 혜택을 줄지 2년간 고민했다고 한다. 그렇게 진행한 프로젝트 덕분에 지연이는 병명을 알게 됐고, 처음으로 약을 먹을 수 있었다. 지연이 엄마는 “재활로 극복될 줄 알았는데 달라지는 게 없어 5년 지났을 땐 내려놓게 됐다. 이제 병을 알았으니 희망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건희 기부금이 투입되는 각종 프로젝트는 앞으로 10년간 지연이 같은 희귀병 환자와 소아암 환자 약 1만7000명에게 직·간접적인 혜택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과제도 163건이 정해져 올해 본격적으로 출범했다. 참여 병원(사업 간 중복 포함) 144곳, 관련 인력 848명이 투입된다.

베들렘근육병·주버트증후군…치료길 열린 희귀병 아이 500명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4일 서울대어린이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반모(13)군이 담당 수간호사에게 선물을 받고 있다. 김종호 기자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4일 서울대어린이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반모(13)군이 담당 수간호사에게 선물을 받고 있다. 김종호 기자

이번 프로젝트로 10년간 원인을 몰라 고통받다가 ‘베들렘 근육병’을 진단받은 아이도 좋은 예후가 기대되는 치료를 시작했다. 태어날 때부터 경련과 안구 운동 장애로 병원을 찾은 아이는 ‘주버트 증후군’을 진단받았다. 제대로 된 유전 위험도를 알게 된 부모는 둘째 아이 계획과 치료 계획을 세웠다.

서울대병원에 따르면 지연이처럼 검사를 지원받은 희귀병 어린이 환자가 지난달까지 500명 정도다. 학계는 밝혀진 희귀병만 8000여 개고,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 수천여 개 있는 것으로 본다. 희귀병 진단이 어려운 건 의사 한두 명의 노력으로는 밝혀내기 힘들어서다. 환자와 의사가 1대1로 진단하는 방식으로는 희귀병을 밝혀내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희귀병 진단을 목표로 거액이 투입된 프로젝트에서는 최종 진단이 내려지기까지 4~6개월에 걸친 추가 검증 등이 가능하다. 채종희(소아청소년과 교수) 서울대병원 소아암·희귀질환지원사업단 희귀질환사업부장은 “유전체 검사 비용뿐 아니라 유전자 기능을 연구하는 팀들의 노하우, 실험 등이 투입된다. 이런 건 이건희 기부금이니까 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렇게 많은 아이가 지원을 받고, 수천~수만 명의 데이터가 모여 데이터베이스(DB)화하면 미래의 새로운 치료제를 만드는 기본을 다지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이 병원 소아간호과가 주관한 선물나눔 행사에서 입원 환아가 손등에 스티커를 받는 모습. [사진 서울대어린이병원]

이날 이 병원 소아간호과가 주관한 선물나눔 행사에서 입원 환아가 손등에 스티커를 받는 모습. [사진 서울대어린이병원]

희귀질환이나 소아암과의 싸움은 이처럼 획기적인 연구비를 투입해야 가시적인 진전이 가능하다. 넥슨재단이 어린이공공재활병원을 짓는 데 100억원을 기부했던 식으로 말이다. 현실은 아직 미흡하다. 지난해 기준 희귀질환 환자 단체인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에 들어온 민간 기부는 10억원 정도다. 병원과 사회복지법인으로도 산발적으로 돈이 모이지만 큰 효과를 보기 어려운 수준이다. 연합회 관계자는 “더 많은 기부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병원에 따르면 이건희 기부금 3000억원 중 600억원가량이 희귀질환 관련 분야에 쓰인다. 나머지는 소아암(1500억원), 공동 연구(625억원) 등에 투입된다. 3월 기준으로 33명의 소아암 환자가 ‘미세 잔존암 분석’ 검사를 무상으로 받았다. 치료가 얼마나 잘 반응하는지 평가해 치료 수준을 결정할 수 있게 해주는 검사다. 건강보험이 적용돼도 50만원인 고가 검사를 매달 15~20명씩 지원해 10년간 2000명의 환자가 혜택을 보게 된다. 홍경택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최대한 많은 환자가 지원받게 해 향후 백혈병 등의 치료에 있어 윤활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대병원의 임상 경험과 치료 가이드라인을 지역 병원과 공유하는 플랫폼을 만드는 것도 기부금으로 가능해진 일이다. 채종희 교수는 “정보를 지역의 어린이병원 선생님들과 잘 나눠 지역에서도 경험을 공유하도록 연구 플랫폼을 만드는 게 목적”이라며 “지역에서도 희귀질환에 관심 있는 젊은 전문가를 양성해 역량을 강화하고, 지역 환자가 서울에 오지 않고도 빠르게 진단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채 교수는 “앞으로 치료제를 개발하고 유전자 맞춤 치료를 하면서 4차 바이오산업의 정상에 서는 데 있어 이건희 기부금이 탄탄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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