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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쾌도난마와 현실 사이

중앙일보

입력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쾌도난마(快刀亂麻). 잘 드는 칼로 마구 헝클어진 삼 가닥을 자르듯이 어지럽게 뒤얽힌 사태를 단칼에 정리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말처럼 쾌도난마가 쉬운 게 아니다. 솜씨 좋은 숙수(熟手)도 아닌데 무 자르듯 칼을 휘둘렀다가 현실의 중요한 대목마저 잘려나가는 낭패가 생길 수 있다. 특히 진실이 이도 저도 아닌 중간 어정쩡한 곳에 있을 때가 그렇다.

 잇따른 사고로 ‘안전 대한민국’의 위상이 말이 아니다. 어느 정도일까. 지난주 통계청 통계개발원이 ‘한국의 안전보고서 2022’를 냈다. 불안한 통계와 안전해진 통계가 뒤섞였다. 봄이면 더 심해지는 한국의 매캐한 공기는 선진국 중 최악이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추정한 한국의 2020년 미세먼지(PM2.5) 농도는 25.9㎍/㎥로 OECD 1위였다. OECD 평균(11.8㎍/㎥)의 두 배를 웃돌았고, 미세먼지가 가장 적은 핀란드(5.0㎍/㎥)의 다섯 배에 달했다. 근처 일본(13.0㎍/㎥)도 우리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나 홀로 약세 원화 불안하긴 하지만
위기의 전조로 보는 건 다소 지나쳐
국민연금 통화스와프로 안정 기대

 미세먼지 농도가 2020년 이후 하락 추세라지만 별로 위안이 못 된다. 코로나19로 3년간 유지되던 중국의 봉쇄 정책이 풀리면서 대륙의 공장이 본격 가동되고 있어서다. 코로나로 주춤했던 중국발 미세먼지가 다시 기승을 부릴 가능성이 크다. 오존주의보 발령일수도 2021년 67일로 전년(46일)보다 21일 늘었다.

 코로나19 이후 개인과 사회는 안전에 더 취약해졌다. 아동학대 피해 신고가 2021년 18세 미만 추계인구 10만 명당 502.2건으로 전년(401.6건)보다 크게 증가했다. 신체적·정신적 위기 상황에서 도움받을 곳이 없는 사람의 비율인 ‘사회적 고립도’는 2021년 34.1%로 2019년(27.7%)보다 늘었다. 집안일을 부탁할 사람도, 필요할 때 이야기할 상대도 하나 없다는 이들이다. 한국의 2020년 자살률 역시 인구 10만 명당 24.1명으로 OECD 1위였다. OECD 평균(11.1명)의 두 배 이상이다. 산재 사망자 수도 2019년 이후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반면에 야간보행 안전도는 2021년 OECD 9위에 올랐다. 밤 거리 안전은 역시 상위권이었다. 경찰·소방관 등 공공안전 인력도 늘었으며 병원의 병상 수도 OECD 최고 수준이다. 산재보험이 적용되는 근로자 수도 지난해 2000만 명을 넘어섰다. 어느 쪽이든 전체적으로 한국이 더 안전해졌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엔 속 시원한 답이 못 된다. 우리에게 부족한 부분을 파악해 보완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환율도 사정이 복잡하다. 물론 원화값 하락세는 불안하다. 지난해 원화 약세는 강달러 영향이 컸다. 다른 통화와의 동반 약세여서 그나마 견딜 만했다. 하지만 이번엔 원화의 나 홀로 약세다. 무역수지 적자가 14개월째 이어졌고 미국과의 기준금리 격차가 더 커질 가능성에 미·중 갈등으로 인한 불확실성까지 겹쳤다. 한국 경제의 수출 경쟁력 같은 기초체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경고로 여기고 경계감을 가져야 한다. 무엇보다 전기요금 인상을 더 미루지 말고, 무역수지가 더 이상 악화하는 건 막아야 한다.

 하지만 위기의 전조라고 걱정하는 건 다소 지나친 감이 있다. 원화 약세는 반도체 수출 기업의 적자 규모를 줄이고 해외관광 수요가 과도하게 늘어나지 않도록 제어하는 순기능도 있다. 지난해처럼 원화가 급락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본다. 무엇보다 한국은행과 국민연금의 통화스와프가 원화의 급격한 약세를 막는 방파제 역할을 톡톡히 할 것 같다. 지난 4월 350억 달러로 통화스와프 한도를 높여놓았고 지난해 12월 국민연금의 환헤지 비율을 0%에서 최대 10%까지 올려뒀다. 환율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뛰면 헤지를 위한 국민연금의 선물환 매도 물량, 즉 달러가 자동적으로 쏟아질 것이다. 국내 외환시장에서 달러 사자에 나선 투기 세력엔 무서운 부비트랩이 아닐 수 없다.

글 = 서경호 논설위원 그림 = 안은주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