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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복룡의 신 영웅전

신숙주의 유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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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항일이니 친일이니 나라가 어수선한 때에 춘원 이광수를 논하는 것은 마음 편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한국 현대문학사의 큰 인물임이 틀림없다. 우리 시대에 『단종애사』나 『흙』을 읽고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에게는 친일 시비가 아니더라도 실수가 있었다. 역사소설 속에서 몇몇 인물의 사실을 왜곡했다는 점이다.

대표적 희생자가 신숙주(申叔舟·1417~1475)다. 명문 고령 신씨 후손으로 중국어·일본어·여진어를 이해하는 드문 지식인이었다. 그가 동갑내기 수양대군(훗날 세조)을 만난 것은 어쩌면 운명일 수도 있다. 신숙주의 허물은 동지 성삼문(成三問)과 단종 복위 운동에서 운명을 함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절의를 숭상하던 당시 풍조로 보면 그런 처사가 미담이 될 수는 없지만, 신숙주는 나름 역사에서 역할이 있었다.

신 영웅전

신 영웅전

성삼문이 국문(鞫問·임금의 심문)을 겪으면서 신숙주를 비난했고, 신숙주가 부끄러워 자리를 피했다고 이광수는 소설에서 묘사했다. 그런데 신숙주는 그 자리에 없었다. 더욱이 이광수는 ‘신숙주가 귀가하자 그의 아내는 부끄러운 마음에 목을 매어 자결했다’고 썼다. 터무니없이 ‘숙주나물’이라는 비아냥으로 그를 다시 망신 줬다.

그러나 신숙주의 부인 윤(尹)씨는 자살은커녕 천수를 누렸다. 소설의 공간과 현실이 다를 수 있지만 이건 아니다. 신숙주가 동지와 함께 죽지 않은 것은 계유정란(癸酉靖難)보다 외환이 더 엄중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475년 신숙주가 운명(殞命)할 즈음 성종이 승지를 보내 “경이 나에게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무엇이오”라고 물었다. 신숙주는 “바라건대 조선은 일본과 등지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願國家無與日本失和)”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선조조 고사본말). 이것이 오늘의 한·일 관계에 교훈을 주는 금석지언(金石之言)이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