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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자 현혹 ‘무늬만 2차전지’ 걸러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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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디스플레이 장비 제조사 엘아이에스 주가는 2021년 6월부터 약 두 달간 67% 상승했다. 자회사 인수로 2차전지 사업에 진출한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다. 이 회사는 2018년 2차전지 부품 제조업을 사업 목적에 추가했고, 지난 3월 말 공시한 사업보고서에도 “레이저 기술을 활용한 2차전지 제조 장비 개발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회사의 2차전지 관련 매출 실적은 파악하기 어렵다. 게다가 기존 사업마저 악화해 회생절차가 진행 중이다. 온라인 종목 토론방에 한 개인 투자자는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이 회사의 2차전지 기술력이 어느 수준인지 알 수가 없다”며 “상장폐지만은 면했으면 하는 바람”이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2차전지 테마가 증시를 달구면서 ‘묻지마 투자’ 피해 사례도 속출할 조짐이다. 3일 중앙일보가 최근 하루 만에 10% 이상 주가가 급등한 주요 2차전지 관련주 11곳의 사업보고서를 조사한 결과, 지난해 2차전지 사업 매출액을 확인할 수 없는 곳은 총 9개사였다. 이 중 5개사는 올해 주주총회(주총)에서 2차전지 사업을 정관에 추가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2차전지는 충전으로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전지로 스마트폰·전기차 등에 쓰인다. 미래 성장성이 기대되는 분야인 데다, 정부가 지난달 20일 2차전지 산업경쟁력 강화 전략을 발표하면서 증시에서도 인기 테마로 떠올랐다.

주목받는 미래 성장 사업이 등장할 때마다 상장사가 정관을 변경하는 사례는 잦았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올해 3월 말까지 2차전지·인공지능·로봇 사업을 정관에 추가한 상장사는 총 105곳(2차전지는 54곳)에 달했다.

기업이 유망 시장에 진입해 새로운 수익 창출을 위해 정관을 바꾼 경우도 있다. 하지만 주가 부양을 위해 인기 테마에 올라타려는 ‘무늬만 신성장’ 기업인 경우도 많다는 게 금융당국의 설명이다. 이복현 금감원장도 최근 “2차전지 등 신사업 테마주 열풍으로 주식시장이 과열되고 있다”며 “불공정거래 개연성이 있는 종목은 신속히 조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최근까지도 2차전지 관련 단순 계약이나 확정되지 않은 투자 소식만으로 주가가 급등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올해 2차전지 사업을 신사업으로 추가한 그릴 제조사 자이글은 미국 버지니아주에 2차전지 합작법인(JV) 설립을 협의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지난 2일 상한가를 기록했다.

건축자재·통신기기 제조사인 중앙디앤엠도 올해 주총에서 2차전지 사업을 사업 목적에 추가한 뒤 약 한 달간 주가가 343% 상승했다. 이 회사는 지난해 회계감사 결과 지속 가능한 경영을 장담하기 어렵다는 외부감사인의 강조사항인 ‘계속 기업 관련 중요한 불확실성’이 제시됐고, 내부 자금·회계 관리 부실로 내부회계 검토의견 역시 부적정을 받았다. 하지만 주가엔 2차전지 신사업 기대감이 더 크게 작용한 셈이다.

이처럼 2차전지 투자 열풍이 이어지며 금융당국은 투자자가 ‘무늬만 2차전지’인 상장사를 걸러낼 수 있도록 공시를 강화할 방침이다. 정관상 사업 목적에 신규 사업을 추가한 곳은 진행 경과를 분기·반기보고서와 사업보고서에 의무적으로 기재토록 했다. 진행 상황이 없었다면 그 사유도 기재해야 한다.

전문가는 신사업 테마주에 투자하기 전에 공시 내용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바이오·블록체인 등 유행했던 신사업을 정관에 추가했는데도, 진행 사항이 없는 기업이라면 앞으로 추가되는 신사업도 비슷한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과거 바이오가 뜰 땐 너도나도 사업 목적에 바이오를 추가했지만, 실제로는 사업을 시작하지 않은 상장사도 많았다”며 “기업이 미래 유망 사업에 관심을 보이는 건 자연스럽지만, 사업 능력이 있는지 신중히 따져보고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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