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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이미지" 말만 반복…시각장애인 쇼핑몰 접근권 6년 분쟁

중앙일보

입력

“상품이미지 1, 상품이미지 1, 상품이미지 1….”

 눈을 감고 시각 장애인이 쓰는 스크린 리더기(글자를 읽어주는 프로그램)를 켠 채 한 인터넷 쇼핑몰에 접속했다. “텍스트 수정”이라는 음성 안내에 따라 검색창에 ‘운동화’를 입력하고 A사 제품 소개 페이지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여러 번 클릭한 끝에 제품명이나 가격, 사이즈 등 기본적인 정보를 인식하는 데까지 성공했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하단의 제품 상세페이지로 내려가자 리더기가 텍스트를 인식하지 못하고 “상품이미지”라는 말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맨눈으로 보면 제품 교환정보, 용도, 소재, 제조사 등이 적혀있지만, 파일 형식이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JPEG)여서 발생하는 문제다. 어떤 부분에선 “물결”, “슬래시” 등 이미지 파일의 코드를 읽어주기도 했다. 제품 외관에 대한 묘사가 없어서 구체적으로 생김새를 확인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시각장애인 963명 “대체텍스트 부족, 차별 여전” 

지난해 5월 20일 서울 강서구는 구 홈페이지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전자점자 서비스를 도입했다. 구 홈페이지 내 '전자점자뷰어보기'를 누르면 해당 정보가 전자점자로 변환되고, 시각장애인은 자신이 가진 점자정보단말기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 스크린 리더기 등을 사용하면 텍스트를 음성으로 들을 수 있다. 강서구.

지난해 5월 20일 서울 강서구는 구 홈페이지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전자점자 서비스를 도입했다. 구 홈페이지 내 '전자점자뷰어보기'를 누르면 해당 정보가 전자점자로 변환되고, 시각장애인은 자신이 가진 점자정보단말기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 스크린 리더기 등을 사용하면 텍스트를 음성으로 들을 수 있다. 강서구.

지난 27일 시각장애인 963명은 서울고법에서 열린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 마지막 변론기일에서 이 같은 인터넷 쇼핑몰의 문제점이 수년째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1·2급 시각장애인 963명(원고)이 SSG닷컴·롯데쇼핑·G마켓을 상대로 각 사가 1인당 200만원씩 위자료를 지급하라며 처음 손해배상 소송을 낸 건 6년 전인 2017년 9월이었다.

시각장애인들은 “SSG닷컴 등이 온라인 쇼핑몰에 대체 텍스트를 제공하지 않거나 미흡하게 제공해, 시각장애인들이 판매 상품에 관한 정보 등을 얻을 수 없고 구매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정당한 사유 없이 시각장애인들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정보를 제공한 것은 차별행위”라고 항의했다.

1심 판단 어땠나

지난 2020년 12월21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모습. 뉴스1.

지난 2020년 12월21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모습. 뉴스1.

1심 재판부는 이들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였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0부는 2021년 2월 “SSG닷컴 등은 시각장애인들에게 각 10만원씩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 20조(정보접근에서의 차별금지) 1항에 따르면 개인·법인·공공기관은 장애인이 전자정보와 비전자정보를 이용하고 그에 접근함에 있어, 장애를 이유로 차별행위를 해선 안 된다.

당시 재판부는 이들 3사의 대체 텍스트 제공 등 서비스가 ‘정당한 사유 없이 장애를 고려하지 않은 기준을 적용함으로써 장애인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장애인차별금지법 4조 1항 2호)’에 해당하는 것으로 봤다.

재판부는 “원고들은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오프라인 또는 온라인 쇼핑몰에서 상품을 구매할 기회를 보장받아야 함에도, 피고들의 차별행위로 상품구매에 어려움을 겪게 됐다”며 “원고들이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입었을 것임은 경험칙에 비춰 인정되므로 장애인차별금지법 46조 1항에 따라 이를 금전으로 위자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6개월 이내에 화면낭독기 등으로 읽힐 수 있는 형태의 대체 텍스트를 제공하라고 했다.

항소한 쇼핑몰 3사 “상품 80만개를 어떻게…”

대법원은 지난해 2월 경기도ㆍ서울시 버스회사 등을 상대로 제기한 차별구제 사건(2019다217421)에서 휠체어 탑승설비 등을 제공하지 않은 것은 차별행위지만, 여기서 나아가 저상버스를 도입하거나 즉시 모든 버스에 휠체어 탑승설비를 설치하는 것은 재량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라고 봤다. 인터넷쇼핑몰 측은 법률에 명시돼 있지 않은 기술적인 부분까지 제공할 의무는 없다는 입장이다. 대법원.

대법원은 지난해 2월 경기도ㆍ서울시 버스회사 등을 상대로 제기한 차별구제 사건(2019다217421)에서 휠체어 탑승설비 등을 제공하지 않은 것은 차별행위지만, 여기서 나아가 저상버스를 도입하거나 즉시 모든 버스에 휠체어 탑승설비를 설치하는 것은 재량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라고 봤다. 인터넷쇼핑몰 측은 법률에 명시돼 있지 않은 기술적인 부분까지 제공할 의무는 없다는 입장이다. 대법원.

그러나 선고 다음 달인 2021년 3월 SSG닷컴 등 3사는 재판부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이후 지난해 9월까지 6번의 변론기일이 열리는 등 재판이 장기화하다 재판부의 제안에 따라 조정절차가 시작됐지만 이마저도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원고 측은 ‘대체 텍스트가 미흡할 경우 시각장애인 측이 업체 측에 신고하고 10일 이내에 보완하지 않을 경우 벌금을 부과한다’는 취지의 중재안에 반발했고, 쇼핑몰 측도 위자료 제공 등에 반대하며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G마켓 측은 27일 마지막 변론기일에서 “G마켓은 통신판매중개업자로 ‘장’만 열어주는 사업자”라며 “대체 텍스트 제공 부분은 (플랫폼이 아닌) 판매자의 관리 영역”이라고 말했다. 또 “1심 판결 이후 대체 텍스트를 기계적으로 처리해주는 프로그램도 독자적으로 개발해서 적용하고 있고, 신고센터도 운영 중”이라며 “연간 웹사이트 신규 등록 상품이 80만개인데 일일이 확인해 수정·보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SSG닷컴 측은 지난해 2월 대법원 판결을 인용하며 “법률상 명시적인 근거가 없는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2월 대법원은 서울시·경기도 등의 버스 회사가 휠체어 탑승설비 등을 제공하지 않은 것은 장애인차별금지법이 금지하는 정당한 편의제공 의무 위반이자 차별행위에 해당한다고 봤다. 하지만 저상버스까지 도입해야 할 의무는 없으며 즉시 모든 버스에 휠체어 탑승설비를 설치하는 것은 버스 회사의 재정상태 등을 고려하지 않아 재량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라고 했다.

SSG닷컴 측은 “장애인들을 위한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다”라며 “OCR(광학문자인식) 등을 제공하고 일부 미흡할 수 있지만 계속 수정·보완할 예정이라는 부분을 감안해달라”고 말했다. 안동한 한국디지털접근성진흥원 팀장은 “쇼핑몰 측 조치에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고 여전히 불편한 상태”라며 “시각장애인들도 가격·상품명만 듣고 구매를 결정할 수는 없는 건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 소송의 2심 선고는 다음 달 25일 내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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