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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의 직격인터뷰

“교육·복지 투자로 생산성 높여 ‘멋진 노동자’ 만들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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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음식으로 경제 이해하는 『경제학 레시피』 펴낸 장하준 교수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장하준 런던대 교수는 이종격투기 선수 같다. 시장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며 복지국가를 강조할 때는 영락없는 진보지만, 경제발전에서 정부가 주도하는 산업정책의 중요성을 얘기하고 대기업의 경영권은 지켜주되 투자를 끌어내는 재벌과의 타협을 주장하는 대목은 보수 쪽에 가깝다. 단기 이익을 좇는 주주 자본주의에 반대하고 제조업을 중시한다. 좌우 양쪽에서 모두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최근 요리를 앞세워 경제 얘기를 풀어가는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를 출간한 장하준 런던대 교수를 18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세상 달라졌다” 노동의 질적 유연성 높이고 생산성도 올려야
기본적인 팩트체크부터 해야 진영 갈등 줄이고 타협도 가능
경제학자 더 소통해야…국민이 경제학 알아야 민주주의도 작동
미·중 경제 분리 힘들어…30~40년 된 현재 공급망 쉽게 못 바꿔

18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난 장하준 런던대 교수. 장 교수는 “경제학은 이론적 다원주의, 정책은 실용주의와 점진주의를 추구한다”고 했다. 김경록 기자

18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난 장하준 런던대 교수. 장 교수는 “경제학은 이론적 다원주의, 정책은 실용주의와 점진주의를 추구한다”고 했다. 김경록 기자

한겨레에 나온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 회고록에 노무현 정부 출범 전후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를 청와대 경제자문위원장으로 검토했고 장 교수가 스티글리츠의 승낙을 받아내는 등 다리를 놨다고 썼다.
“내가 정치에 관여하는 사람은 아닌데, 정태인 당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나중에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을 지냈다)이 스티글리츠를 잘 아는 내게 부탁했다. 유럽 기준으로 보면 대단한 좌파도 아니지만, 어쨌든 좌파 정부가 출범하니까 국제자본시장에서 사시(斜視)로 보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 같다. 명망 있는 외국 교수를 자문으로 초빙해 조언도 듣고 신뢰성도 얻자는 취지였는데 잘 안됐다. 인수위의 과민반응 탓이다.”(2003년 초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 시절, 전경련 임원이 외신 인터뷰에서 인수위를 “사회주의적(socialist)”이라고 표현해 논란이 됐다.)
스티글리츠의 진보 성향 때문에 월가의 신뢰를 얻는데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게 반대 이유였다.
“굳이 말하자면 스티글리츠는 중간에서 왼쪽으로 간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좌파는 아니다.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할 때 국제통화기금(IMF) 비판했다고 월가가 싫어할 거라는 얘기는 너무 알아서 긴 것 아닌가. (노무현 정부 인수위가) 미국에서 보면 좌파일지 모르지만 독일에서 보면 메르켈의 기민당보다 우파다. 그 정도도 소화 못 하나. 사실 비즈니스쪽 분들은 포용력이 넓다. 돈을 버는 게 가장 중요한 목적이어서 어느 이론이냐 무슨 학파냐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비주류 경제학을 하지만 사업가를 설득하기는 더 쉬웠다. 내가 반(反)자본주의자가 아니라는 것만 초반에 이해시키면 내 이론이 마르크스에서 끌어온 것이든, 하이에크에서 끌어온 것이든 상관 안 한다.”
자본의 합리성 같은 것이겠다.
“그렇다. 영국에선 산업정책을 노동당이 했기에 산업정책 얘기하면 좌파라고 하고, 한국에선 박정희 때 했기 때문에 운동권 출신 중에는 산업정책 옹호하는 내게 ‘파쇼’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중앙은행 독립도 유럽에선 우파 정책, 과거 관치금융을 경험한 한국에선 좌파 정책이라고 한다.”
개발경제학자 혹은 제도경제학자로 불리던데.
“사실 난 학파를 따지는 사람이 아니다. 모든 학파가 장단점이 있고 배울 게 있다. 내가 개발경제학자·제도경제학자로 많이 인용되는 건 내 연구의 주제가 경제발전, 특히 산업화여서다. 내가 추구하는 경제학은 이론적 다원주의다. 정책적으로는 실용주의고.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행동주의 경제의 창시자 허버트 사이먼에게 가장 많이 영향을 받았다.”
우파는 자본론을 읽고 좌파도 하이에크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결론엔 90% 이상 동의하지 않지만 그들의 사회 분석에서 많이 배웠다. ‘본능과 지성 사이에 관습과 전통이 있다’고 했던 하이에크로부터는 점진주의를 배웠다. 경제는 이데올로기로 접근하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는 어느 경제이론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나라다. 자유무역을 하고 외국인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지만, 토지의 90%를 국유화했고 주택의 80% 이상을 정부가 공급한다. 국내총생산(GDP)의 20% 이상을 국영기업이 산출한다. 땅 좁고 인구밀도 높은 나라에서 토지·주택문제가 해결 안 되면 정치가 불안하고 경제 발전도 못 한다. 그래서 실용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경제학의 95%는 상식을 복잡하게 만든 것이다. 나머지 5%도 아주 전문적인 부분까지는 아니지만 거기에 숨은 근본 논리는 쉬운 말로 설명할 수 있다.’고 썼다. 그런데 왜 경제학 어렵다는 이들이 많을까.
“대중과 소통하려는 경제학자의 노력이 부족했다. 경제학이 어렵고 무서운 학문이라는 선입견이 있고 경제학자들도 이를 은근히 즐긴다. 시민들이 경제학을 배워야 시장주의가 득세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한다.”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감세로 투자가 확대된다는 주장은 증거가 없는 얘기”라며 “세율 자체보다 그것으로 나라가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한국은 어떤가. 세금 낸 만큼 기업 활동하기 좋은 나라, ‘세금 가성비’가 있는 나라인가.
“잘 못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부는 개별 기업이 할 수 없는 걸 해줘야 한다. 수도권 집중을 줄여 지역에서도 물류가 편하고 좋은 인재도 구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복지에 투자하고 노동자 재교육과 재취업 잘하게 하면 해고도 쉽게 할 수 있다. 그래야 기업을 경영하기 좋은 나라가 된다.”
몇 년 전 강연에서 소수의 승자가 폭식하고 나머지 절대다수가 도태하는 ‘압정형 사회’는 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복지를 강화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정부는 고령화 추세를 고려할 때 현재의 복지를 유지해도 복지비용이 커지는 속도가 빨라 재정 부담이 커진다고 우려한다.
“기획재정부 설명처럼 구조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자살률 1위, 특히 노인자살률 1위, 출생률 꼴찌 등 복지가 더 필요하다는 객관적인 지표가 분명히 나와 있다.”
2009년 본지 인터뷰에서 “정치는 경제의 경계선을 규정짓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요즘 윤석열 정부 지지도가 20%대로 떨어졌다. 정부에 조언한다면.
“진취적인 어젠더를 가졌으면 한다. 우리 사회는 지난 60년간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영국으로 말하면 18세기 말에서 갑자기 21세기로 온 거다. 시대가 바뀌었다. 노동시간 제도 개편도 못 할 얘기는 아니지만 노동의 질적 유연성을 높이는 게 중요하다. 노동자 한 사람이 여러 기술을 갖고 있고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멋진 노동자’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 나라 밖에서 보면 22세기를 사는 것처럼 보이는 데 정책 어젠더는 옛날식이어서 안타깝다.”
진영 갈등이 심각하다. 지지정당이 다르면 결혼은 물론, 연애하기도 싫다는 이들이 많다.
“적어도 서로 기본적인 팩트체크는 했으면 한다. 같은 대상을 두고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대화가 되겠나. 이번에 방한해서 거리에 내걸린 정치권 플래카드 보면서 충격받았다. 상대방 얘기를 ‘괴담’ ‘거짓말’이라고 하던데, 그런 자세로 어떻게 논쟁하고 타협을 하겠나.”
노사 갈등도 심각하다.
“경제정책으로 다 풀 수는 없다. 정치로 풀어야 한다. 스웨덴도 1920년대 노사 갈등이 심했다. 이러다가 다 같이 망한다는 위기감에서 노사가 대타협을 했고 복지국가를 키웠다. 최소한의 기본은 보장한다는 합의를 하고 약육강식이 아니라 공정한 경쟁을 하는 분위기가 돼야 평화가 온다.”
미·중 갈등을 보면 미국이 자유무역이 아니라 보호무역으로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다
“미·중 경쟁은 과거의 미소 냉전과는 다를 것이다. 과거엔 두 블록이 경제적으로 완전히 분리됐지만 지금 미국과 중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중국의 싼 소비재가 없으면 미국 상점을 텅 빌 것이다. 현재의 공급망은 과거 30~40년간 만든 것이다. 쉽게 바꾸기 힘들다.”
미국에 투자하는 한국 대기업이 늘어나면서 제조업 공동화를 걱정하기도 한다. 첨단 제조공정은 국내에 남겨둘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 방향이 맞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따라오기 힘든 기술은 자기네 땅 안에 쥐고 있어야 한다. 자본에도 국적은 있다. 자본의 뿌리가 어디냐에 따라 최고경영자가 달라지고 고부가가치가 어디서 나오는지도 영향을 받는다.”
이기주의자보다 독선주의자가 더 위험하다고 썼던데.
“이기주의자는 정책 인센티브를 바꾸면 다른 식으로 행동한다. 반면 독선주의자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기에 아무리 인센티브를 바꿔도 행동을 바꾸지 않는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특정 개인을 떠올리고 한 얘기는 아니다.”
케인스는 데이터 등 상황이 달라지면 과거 주장을 수정하는 유연함을 보였다. 더 발전한 나라와의 무역은 해롭다는 이유로 한·미 FTA에 반대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인가.
“미국과 기술 격차가 있는 만큼 우리의 최첨단 산업을 키우려면 보호무역이 필요하다고 봤다. 당장 망한다는 얘기도 아니었다. 10년 후에 보면 내가 틀렸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판단을 바꾸진 않겠다.”

◆장하준 교수=1963년생. 서울대 경제학과(82학번)를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 한국인 첫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됐다. 지난해 SOAS 런던대로 옮겼다. 『사다리 걷어차기』 『나쁜 사마리아인』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등 17권의 책을 썼다. 김대중 정부에서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장재식씨가 부친, 과학철학자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동생이다. 요리와 추리소설, 공상과학 소설 읽는 게 취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