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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위안부 책임 묻다…김문숙 삶을 통해 본 ‘관부재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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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면

관부재판의 원고 소송단을 이끈 고 김문숙 전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이사장. [연합뉴스]

관부재판의 원고 소송단을 이끈 고 김문숙 전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이사장. [연합뉴스]

경남 창원대는 대학 박물관 조현욱아트홀에서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허스토리)’ 전시를 열고 있다. 지난 2월 15일 시작한 전시회는 오는 5월 19일 끝난다. 이번 전시는 ‘관부재판’과 원고 소송단을 이끈 고(故) 김문숙 전 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이사장 생애를 재조명하는 데 집중했다. 관부재판은 지방법원의 1심 판결이긴 하지만, 일본 사법부가 자국의 위안부 제도 존재와 국가적 차원 강제 동원이었음을 인정한 재판이다. 2018년 배우 김희애가 주연한 영화 ‘허스토리(Herstory)’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관부(關釜)는 일본 시모노세키(下關·하관)와 부산(釜山) 지역을 말한다.

관부재판을 맡은 일본 야마구치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 지방부(1심)는 1998년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원고 측이 제기한 5가지 청구 중 ‘입법 부작위에 의한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했다. 1993년 일본군 위안부 모집 강제성을 처음 인정한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담화(고노 담화) 이후에도 일본 정부가 배상입법 의무를 다하지 않았단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1심 선고는 2001년 히로시마 고등재판소(2심)에서 뒤집혔고, 2003년 도쿄 최고재판소(3심)에서 패소가 확정됐다.

원고였던 부산에 살던 위안부(3명)·근로정신대(7명) 피해자 10명은 소송을 제기한 1992년부터 1심 판결이 나오기까지 6년간 26차례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왕복했다. 23번의 공판에 참석, 직접 피해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서였다. 이동한 거리만 1만1101㎞에 달했다. 당시 이들 평균 나이는 65.8세였다.

1993년 일본 시모노세키 재판소에서 나오는 위안부·정신대 피해자들과 김문숙 이사장(왼쪽). [사진 민족과 여성 역사관]

1993년 일본 시모노세키 재판소에서 나오는 위안부·정신대 피해자들과 김문숙 이사장(왼쪽). [사진 민족과 여성 역사관]

이들 원고 소송단을 이끈 단장이 김문숙 전 이사장이었다. 1927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그는 이화여대를 졸업한 ‘엘리트 여성’이었다. 영천과 경남 진주에서 교사로 일하다 1965년 부산 아리랑관광여행사를 설립하면서 ‘부산 1호 여사장’이 됐다. 1981년에는 부산여성경제인연합회를 설립한 성공한 여성경제인이었다. 여성운동에도 앞장섰던 그는 1986년 가정폭력 피해자를 위한 ‘여성의 전화’를 부산에 설치했다.

김 전 이사장이 위안부·근로정신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60세가 넘어서였다. 1990년 ‘일본인 한국 기생관광’을 반대하던 그에게 한 일본인이 위안부를 언급하면서다. 그 일본인은 “옛날엔 우리가 돈이 없어 못 줬지만, 지금은 돈 주겠다는데 왜 못하게 하냐”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1991년부터 ‘일본군 위안부 피해 신고 전화’를 운영했다. 그가 여생을 위안부·근로정신대 피해자 지원에 재능과 재산, 시간을 투입한 ‘각성’의 순간이었다.

당시 김 전 이사장이 쓴 수필 『50년 만의 피눈물』(1991년)에는 동시대를 살았던 여성들이 위안부와 근로정신대로 고통받는 동안 자신은 식민지 명문교에서 황민화(皇民化) 교육을 받았던 것에 대한 회한과 성찰이 담겨 있다. 그는 2004년 부산에 ‘민족과 여성 역사관’을 개관하는 등 2021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데 힘썼다. 전시를 준비한 신동규 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전시장에서 관부재판과 그 속에서 김문숙이란 한 인간이 노력하고 헌신했던 게 역사 물줄기를 어떻게 만들어 가는지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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