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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쿨 다니던 서른살, 시력 잃었다…판사 된 그 "뭐든 해봐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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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인 김동현 서울중앙지법 판사가 17일 오후 중앙지법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 중앙지법

시각장애인인 김동현 서울중앙지법 판사가 17일 오후 중앙지법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 중앙지법

“저는 40대 미혼, 독거, 중증 시각장애인입니다. 달리는 것을 좋아하고요, 시각장애인 구기 종목인 쇼다운 선수이기도 하고 에세이를 쓴 작가이기도 합니다.”

17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대회의실. 장애인의 날(매년 4월 20일) 기념 강연을 위해 판사들 앞에 선 국내 2호 시각장애인 법관 김동현(41·변호사시험 4회) 중앙지법 판사의 자기소개다. 눈을 감고 무대에 오른 김 판사가 웃음을 띤 채 ‘미혼’과 ‘독거’를 힘주어 발음하자 좌중엔 웃음이 퍼졌다.

시각 잃은 로스쿨생, 판사 되다

김 판사는 지난 2012년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재학 중 의료 사고로 두 눈의 시각을 잃어 1급 시각장애인이 됐다. 판사는 “될 생각이 전혀 없던” 진로였다고 했다. 부산과학고·카이스트 출신인 그는 “과학기술 정책에 관심이 있어서 공무원시험을 여러 번 봤는데 잘 안 됐고, 계속 공부를 하다 보니 IT 전문 변호사를 해야겠다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사고 이후 “(변호사가 되는 게)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였다”며 1호 시각장애인 판사가 된 최영 부산지법 판사의 선례를 따라 법관을 꿈꾸게 됐다고 했다.

시각장애를 갖고 법을 공부하는 데엔 현실적 장애물이 많았다. 김 판사는 “공부하는 것 자체가 힘든 건 두 번째 문제였고, 제일 큰 문제는 공부할 책을 구하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서른 살에 시각을 잃은 터라 점자를 읽기 어려웠고, 방대한 법학 서적을 점자로 다 만들 수도 없었다. 그는 국립장애인도서관 등에 의뢰해 책 내용을 문서 파일로 변환한 뒤 이걸 ‘스크린 리더’(문자를 음성으로 읽어주는 소프트웨어)로 들으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김 판사는 자신은 운이 좋았지만, 누구나 자신처럼 공부할 수 있는 현실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교수님들께 말씀드리면 책을 지원해 주시는 경우도 있고, 복지재단에서 책을 만들 수 있도록 금전적으로 지원을 받기도 했다”면서 “저는 운이 좋아서 공부를 한 거지, 제도적으로 충분히 뒷받침돼 있다고 할 수 없다. 다른 시각 장애인 학생들도 저처럼 공부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시각장애인인 김동현 서울중앙지법 판사가 17일 오후 중앙지법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 중앙지법

시각장애인인 김동현 서울중앙지법 판사가 17일 오후 중앙지법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 중앙지법

로스쿨을 졸업한 뒤 서울고등법원 사법연구원과 서울시 장애인권익옹호기관 변호사 등으로 일했다. 다른 장애인을 변호하며 “사법 제도에서 장애인 피해자 보호나 지원이 굉장히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는 “학대받은 장애인들이 구조돼 갈 곳이 당시 서울 시내에 네 곳밖에 없었다”며 “(수사기관에서) 발달장애인 피해자의 얘기를 듣고 어떤 얘기를 하는지 알아듣거나, 신빙성을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전문가들을 양성하고 관리해 적절한 방법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2021년 임용돼 판사로 일한 지는 햇수로 3년차다. 재판 기록은 속기사들이 파일로 만들어 주면 스크린 리더를 통해 듣고, 사진이나 영상 등 시각 자료도 속기사들의 설명을 통해 듣는다. 김 판사는 “도면 등을 볼 일이 있으면 3D 펜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 손으로 만지면서 도면을 파악하면 편할 거 같아 도입했는데 효과가 좋다”고 덧붙였다.

“장애는 적응하고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것”

지난해 낸 에세이집 ‘뭐든 해 봐요’에서 “장애라는 건 불편한 상태에 적응하고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는 것이지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고 한 김 판사는 강연 말미에 청중을 향해 “장애인도 우리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한 사람일 뿐이다. 너무 특별하게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그는 “어딘가 불편하지만 따지고 보면 별 특별할 것 없는 사람이란 걸 알아주셨으면 감사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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