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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간첩 잡듯 마약·보이스피싱 수사한다면

중앙일보

입력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모두를 놀라게 한 강남 학원가 마약 음료 사건은 우리 사회의 가장 악질적인 범죄 두 개가 결합한 범행으로 드러나고 있다. 보이스피싱과 마약이다. 관련 피해가 무서운 속도로 번지지만 수사기관 대응은 미흡한 분야다.

 두 범죄의 속성엔 큰 차이가 있다. 마약은 중독자를 은밀하게 접촉하면서 밀매를 한다. 관련 인물들이 마약인 줄 알고 접선하는 방식이다. 보이스피싱은 피해자가 눈치 못 채도록 현혹해 돈을 가로챈다. 상대를 얼마나 완벽하게 속이는지가 관건이다.

 이 두 범죄가 결합해 노린 대상이 우리 청소년이라는 사실이 섬뜩하다. 마약 음료의 정체를 감쪽같이 속여 마시게 한 다음 이를 빌미로 협박해 거액을 갈취하는 시나리오다. 마약이 만연한 환경이 이런 범죄의 토양이 됐다. 마음만 먹으면 범죄 조직은 필로폰을 포함한 갖가지 마약을 한국에서 얼마든 조달할 수 있다. 피해자를 직접 접촉해 범죄를 이행하는 하수인은 보이스피싱 수법으로 포섭했다. 보이스피싱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못하게 가담시키듯 마약 범죄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는 게 체포된 피의자들의 주장이다.

사회 전반에 충격 준 마약음료
해외 보이스피싱 조직 움직여
외국에 있는 주범부터 잡아야

 중국을 무대로 활동하는 보이스피싱 조직이 한국 청소년에게 마약을 먹이는 수법에 착안했다는 사실이 심상치 않다. 이들은 한국인을 속이는 방법만 연구해온 자들이다. 검찰과 경찰은 붙잡힌 한국 하수인에게 “왜 이런 거짓말에 속느냐”고 추궁하지만, 범죄 조직이 한국인을 홀리는 솜씨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이 경기도에서 벌어졌다.

 범죄 표적이 된 여성이 휴대전화로 통화하다가 인근 지구대를 찾아가 경찰관을 바꿔줬다. 예상 못 한 상황이었지만 범인들은 침착하게 거짓말을 이어갔다. “서울중앙지검 홍○○ 검사입니다”라고 태연하게 연기하는 범죄자에게 경찰관이 속아 넘어갔다. 결국 600만원을 뜯기는 피해를 막지 못했다.

 이 정도로 교활한 범죄자들이 한국 고교생을 타깃으로 삼았다는 얘기다. 과거 사례를 짚어보면 하나의 대본은 계속 변주하면서 고도화한다. 대형 마트와 길거리 판매대를 비롯해 곳곳에서 시음·시식 행사가 벌어지는 우리 현실에서 이들은 마약을 몰래 먹일 다양한 대본을 짜고 있을 터다.

 더욱이 우리 사회는 보이스피싱 조직의 온상이 될 만한 여러 조건을 갖췄다. 범행을 구상하고 지휘하는 현장이 중국 등 해외라는 점부터 그렇다. 중국의 공안 당국이 이들을 적발해도 현지 조폭이 손을 쓰면 그냥 풀어준다는 진술을 경찰은 여러 명에게서 확보했다.
외국 범죄 조직이 국내 피해자들에게 접근하려면 한국에서 하수인을 확보해야 한다. 우리 사회엔 이런 하수인 공급처가 널려 있다. 유명한 구인·구직 사이트가 범죄자 모집 루트로 악용된다. 사이트 지명도를 믿고 연락한 대학생이 보이스피싱 조직의 현란한 사기 화술에 휘말려 범죄자의 손발 노릇을 한다.

 어제 ‘현금수거책’으로 재판을 받은 한 대학생은 “고작 20만원 벌려고 보이스피싱에 가담하고 경찰에 자수했겠느냐고 호소했지만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들이 속아 넘어가는 이유는 ‘알바몬’ ‘알바천국’ 같이 이름이 알려진 업체를 통해 구한 일자리기 때문이다.

 해외에 있는 주범을 못 잡는 수사 당국은 손발 노릇을 한 한국 청년이나 주부들을 손쉽게 체포한 뒤 보이스피싱 조직 수사 성과로 홍보한다. 엄청나게 많은 보이스피싱 범죄자를 잡아들이는데도 매년 수만 건의 범행이 쏟아지는 건 주범들이 해외에서 활보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처단하지 않고선 피해를 막기 어렵다. 전문가 사이에선 “국제 공조 수사와 위장 수사 기법 등을 통해 해외에서 차단해야 한다”(경찰청 마약지능수사과장 출신 박상융 변호사)는 주장이 나온다.

 최근 국가정보원과 검경이 적발한 간첩 사건의 경우 2016년 중국, 2017년 캄보디아, 2020년 베트남 등지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한 사실을 잡아냈다. 간첩 사건 하나를 수사하기 위해 길게는 10년 이상 해외 첩보 활동을 벌인다.

 청소년까지 표적으로 삼는 마약과 보이스피싱 범죄는 간첩보다 위험한 존재가 됐다. 목숨을 걸고 해외에서 간첩을 추적하듯 마약과 보이스피싱 역시 중국 등지의 범죄 조직을 붕괴시키는 길을 찾아야 한다.

 범행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따지면 빙산의 얼음 부스러기만도 못한 국내 하수인을 붙잡고 대대적으로 발표하는 수사기관의 관행, 유명 아르바이트 플랫폼이 외국 범죄 조직의 하수인 공급 사이트로 전락하는 현실을 방치하는 한 외국의 마약과 보이스피싱 조직이 한국 청소년을 유린하는 일은 시간문제다.

글= 강주안 논설위원  그림=김아영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