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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혈의 누’ 작가 이인직과 순장바둑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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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이인직

이인직

한국 최초의 신소설 작가 이인직(사진)이 일본의 프로기사 하라 2단과 1909년 3월 3일 도쿄에서 한국 고유의 순장바둑을 두었고 그 기보가 ‘기계신보’라는 잡지에 실렸다. 6점 접은 하라의 3집 승.

이 기보는 바둑서지학자 안영이가 일본에서 찾아낸 것인데 순장바둑 기보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인직이 당시 왜 일본에 있었고 또 일본 바둑과 전혀 다른 순장바둑을 두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최근 계간지인 ‘문학의 오늘’ 봄호에 ‘이인직의 한일바둑’이란 제하의 글이 실려 눈길을 끈다. ‘순장바둑이란 미끼’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글은 저명한 국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최원식이 썼는데 궁금증을 많이 풀어준다. 당시 도쿄 바둑전문지 기계신보는 이인직의 인터뷰를 첫머리에 싣고 대국보와 함께 조선바둑(순장바둑)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글에 따르면 당시 이인직의 직책은 ‘대한신문’ 사장이다. 1907년 이완용의 후원으로 ‘만세보’를 인수하여 새로 창간한 이 신문은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였다가 경술국치(1910) 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병합되었다. 한데 이인직은 1907~1910년까지 3년간, 말하자면 대한신문이 창간되고 폐간될 때까지 일본에 있었다.

기계신보는 “일찍부터 일본주의 사람”으로 이인직을 소개한다. “신문사의 사장으로 멀리서 감독하는 한편 일본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여 사랑스런 아이와 함께 가정을 이루고 (…).”

그는 이완용의 비서로 매국 협상에 앞장섰고 조선 처자를 버리고 일본 처와 조선루라는 요정도 열었다. 이완용에게 일본의 정보를 수집하고 제공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인직이 쓴 최초의 신소설 『혈의 누』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우리나라 사람이 제 몸만 위하고 제 욕심만 채우려 하고 남이 죽든지 살든지, 나라가 망하든지 흥하든지 제 벼슬만 잘하여 제 살만 찌우면 제일로 아는 사람들이라.”

한데 그의 행동은 자신이 쓴 글과 놀랍게도 비슷하다. 그는 혹 자신의 사교와 정보활동을 조선을 위한 암약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혈의 누』의 주인공처럼 신문화를 익혀 조선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라고 자위했던 것일까.

최원식의 글에 따르면 기계신보는 단순한 바둑지가 아니다. 본사 임원엔 총리를 지내다 암살된 이누카이 스노시가 첫 번째고 명성황후 시해를 주도한 조선 전권공사 미우라 고로 등 200명을 웃돈다. 이 잡지는 친일파 이인직을 단박에 알아보고 특필했다. 기회에 순장바둑의 특이한 포진과 계가법을 소개하며 일본바둑이 조선 바둑보다 얼마나 월등한지 선전하는 기회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쯤에서 추측하자면 조선의 바둑은 전체가 초단 이하의 바둑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때로는 색다른 것도 재미있으니까 시험 삼아 조선식 대국을 해보는 것 또한 재미라고 생각됩니다.”

국내에서는 1937년 1월 1일 원남동 조선기원에서 채극문·정규춘·윤주병 등 국수들이 모여 순장바둑 폐지를 결의한다. 이후 모든 대회는 일본식으로 치러지게 되고 순장바둑은 사라졌다.

순장바둑은 초반에 17개(또는 16개)의 돌을 미리 놓고 두기 때문에 포석의 창의력이 크게 제한되는 단점이 있다. 경쟁 측면에서 순장바둑이 사라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귀결이었을 것이다. 하나 오늘날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일본 바둑이 쇠락하고 놀림감이나 다름없던 한국 바둑이 세계에 우뚝 선 것을 보면 역사의 섭리가 그리 간단한 게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최원식은 말한다. “소설을 보면 이인직은 뛰어난 사람이다. 한데 서출이다. 조선의 양반제도가 그를 친일로 몰고 간 측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뒤집히기만 기다리던 사람들에겐 난세가 좋은 활동무대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근대 지식인의 모형이라고 자부했을지 모른다.

이인직의 말년은 한미했다. 친일파들에게서 토사구팽당했다고 한다.

박치문 바둑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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