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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 만에 묘지 발견, 미국서 협의·소송 15년…“100년이나 늦게 고국으로 모셔 죄송”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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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4호 01면

황기환 애국지사

황기환 애국지사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이국 땅에서 숨진 애국지사의 유해를 고국에 모시기까지 꼬박 100년의 세월이 걸렸다. 묘지를 발견하고 난 뒤로부터 따져도 15년이 지났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모티브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황기환 지사 이야기다. 미국 뉴욕의 퀸스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던 황 지사의 유해는 10일 봉환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국가보훈처와 재미 한인들이 힘을 모아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고 끝까지 자료를 찾아내 현지 당국을 설득한 노력의 결과다.

1886년 평남 순천 태생인 황 지사는 임시정부 외교위원으로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을 오가며 일본의 침략 실상을 해외에 알리다 1923년 미국에서 심장병으로 숨졌다. 황 지사는 1995년 독립유공자로 지정됐으나 유해의 행방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황 지사의 묘소는 순국한 지 85년이 흐른 2008년에야 발견됐다. 장철우 뉴욕한인교회 목사가 사망한 교인의 이름과 묘지 위치가 담긴 명부를 우연히 발견한 게 결정적 계기가 됐다. 기록을 찾고 나서도 황 지사의 실제 묘지를 발견하는 데까지는 2년이 걸렸다.  장 목사는 “교회 청년들과 새벽 기도를 마칠 때마다 뉴욕 내 공동묘지를 일일이 찾아다녔다. 행정구역 변동 탓에 기록만으로 황 지사의 묘를 실제 찾는데 2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2년간 뉴욕 공동묘지 샅샅이 뒤져, 황기환 지사 찾고 감격”

2008년 미국 뉴욕 퀸스의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황기환 지사 묘소. [연합뉴스]

2008년 미국 뉴욕 퀸스의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황기환 지사 묘소. [연합뉴스]

“2년 동안 뉴욕 일원의 공동묘지를 뒤져 찾아낸 묘지에 묻힌 분이 한국 정부가 오랫동안 찾고 있던 독립운동가란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말로 표현못할 감격이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 유진 초이의 실존 인물 황기환 지사의 묘지를 찾아낸 장철우 뉴욕한인교회 목사가 국제전화로 전한 회고담이다. 그는 10일 황 지사의 유해를 모시고 한국에 온다.

뉴욕 동포들의 노력끝에 황 지사의 묘지는 찾았지만 유해 봉환은 생각만큼 순탄치 않았다. 2013년 국가보훈처는 ‘황기환 유해 봉환 추진단’을 꾸리고 미국의 공동묘지법인과 이장 문제를 논의했다. 하지만 묘지법인 측은 유족 동의가 없다는 이유로 이장을 허가하지 않았다. 유족이 없으니 유족의 동의를 얻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협의가 거듭 난항을 겪자 보훈처는 2019년 뉴욕 법원에 파묘 청원 소송을 제기했다. 이 역시 유족을 파악할 수 있는 공적 자료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보훈처는 뉴욕한인교회 목사의 진술서와 유족이 없음을 증빙하는 무연고 추정 자료를 추가 보완해 지난해 3월 소송을 다시 제기했지만 5개월 만에 같은 사유로 또다시 기각됐다. 소송을 통한 해결이 난관에 부딪혔으니 남은 길은 묘지법인을 설득하는 것 밖에 없었다. 우여곡절끝에 지난 2월 황 지사의 파묘 합의가 극적으로 이뤄졌다. 당시 합의에 참여한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우리 정부 뿐만 아니라 뉴욕한인회와 공화당·민주당 소속의 뉴욕시 의원까지 합심해 이뤄낸 성과”라며 “2008년 묘비가 발견되고 15년이나 흘려보내 황 지사께 죄송스러운 마음이 크지만 이제라도 고국으로 모시게 돼 다행”이라고 말했다.

황기환 지사가 1차 세계대전 때 ‘황 얼 기환’이란 이름으로 미군에 자원입대했을 당시 등록 카드. [뉴스1·]

황기환 지사가 1차 세계대전 때 ‘황 얼 기환’이란 이름으로 미군에 자원입대했을 당시 등록 카드. [뉴스1·]

1886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난 황 지사는 10대 후반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1918년 미군에 ‘황 얼 기환’이란 이름으로 자원입대해 서유럽 전선에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이로 인해 황 지사는 ‘미스터 션샤인’의 모티브가 됐지만 참전 동기는 뚜렷하게 알려진 게 없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당시 미국 징집법이 ‘군 복무 후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개정됐다. 황 지사가 미국 시민으로 인정받은 후 해외에서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려고 한 게 아닐까 추측하는 정도”라고 말했다.

참전 이후 황 지사는 유럽에 남아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임시정부 부주석·외무부장을 지낸 김규식 선생과 함께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단에 합류하면서 한국 독립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호소한 것이 그 시발이었다. 그는 일본의 한국 침략을 알리는 선전물 등을 만들어 배포하며 일제 침략상과 한국이 처한 안타까운 상황을 유럽인들에 알렸다. 10대 시절부터 갈고 닦은 영어 실력이 독립운동의 자산이 됐고 필요할 때는 프랑스어로도 대한독립을 호소했다. 프랑스에서 독립운동사를 연구한 이장규 박사는 자료집 통해 “황 지사는 베트남 초대 국가주석이자 독립운동가인 호찌민과 함께 프랑스 지리학회에 참석했다. 능숙하지 못한 프랑스어로 ‘독립을 이룰 때까지 끝까지 일본에 맞서 싸울 것’이라며 지지를 호소했다”고 밝혔다.

러시아 철도공사장에서 일하던 한인 노동자들이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으로 강제 이주 당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한 끝에 성과를 거둔 것은 최근 밝혀진 황 지사의 업적이다. 1919년 러시아 무르만스크의 철도공사 현장에서 일한 한인 노동자 200여명이 종전 후 영국으로 거취를 옮기게 되자 영국 정부는 이들을 일본으로 강제 이주시키려 했다. 당시 영국은 일본의 동맹국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황 지사는 영국 정부에 강력 항의해 35명의 한인을 프랑스로 이송하는 데 성공한다. 프랑스 외국인등록부에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Coreen)’ 국적으로 등록하기 위해 프랑스 지방정부를 상대로 끈질긴 설득 작업도 펼쳤다. 독립기념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장은 “독립운동이라고 하면 순국열사와 애국지사가 목숨 바쳐 전투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황 지사는 유럽과 북미권에서 외교와 선전 활동으로 한국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성을 개척한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아 마땅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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