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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복룡의 신 영웅전

청백리 정승 오리 이원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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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꽤 오래 전 경기 광명시 소하동 어느 산자락에 단아한 조선 사대부의 묘지를 찾아갔다.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1547~1634)의 묘소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이조판서와 삼정승을 지낸 묘소치고는 소박했다. ‘하얀 비석’(白碑)이 지금도 눈앞에 선연하다. 흰 비석은 본디 ‘더 보탤 말이 없다’는 뜻이다. 부정부패와 권력형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청백리(淸白吏)에게 주는 최고의 찬사다.

오리 대감이 어느 날 집 앞을 거닐다가 개천에 동전 한 닢을 빠뜨렸다. 정승의 몸으로 동전 한 닢이 대수일까만, 그는 하인들을 불러 개천 도랑을 치고 끝내 동전을 찾아내게 했다. 하인들에게 품삯으로 두 냥을 주었다. 곁에 있던 시자(侍者)가 의아해하며 “한 닢을 찾으려고 두 닢을 쓰셨는데, 왜 그리 손해 보는 일을 하십니까”라고 여쭈었다. 오리 대감이 대답했다. “나는 한 닢을 찾고 하인들은 두 닢을 벌었으니 이보다 남는 장사가 어디 있겠느냐” 하면서 기뻐했다.

오리 이원익 영정

오리 이원익 영정

이원익은 젊어서는 율곡(栗谷) 이이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고, 왜란과 호란을 잇달아 겪으면서 서애(西厓) 류성룡의 믿음이 돈독했다. 조선조 4대 명상의 한 분이었지만 평생을 청빈하게 살아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는 아침밥과 저녁죽(朝飯夕粥)이 어려웠다. 그가 미수(米壽·88세)에 세상을 떠나자 인조 임금이 도승지를 보내 문상했는데 “관을 살 돈이 없고 빈소를 차릴 형편이 못 된다”고 아뢰었다. 인조가 기가 막혀 관청의 재산으로 상을 치르게 했다.

처자가 딸린 공직자도 의식주는 해결할 수 있어야 하고, 모든 벼슬아치가 청빈하기 어려울 수는 있다. 조선 시대 녹봉은 그리 합리적이지 않아 자리에 따라 삼정승과 육판서의 삶이 달랐다. 그렇더라도 ‘50억 클럽’ 탐관오리들과 함께 같은 하늘 아래 살아야 하는 우리의 가슴은 왜 이렇게 아린지.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