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태유의 퍼스펙티브

무능한 충신이 나라 망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국가 발전 거스르는 보수·진보 정책들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 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 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내우외환(內憂外患)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세계적 코로나 팬데믹 위기 이래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에 따른 인플레이션과 경제위기 공포가 엄습하고 있다. 밖으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국과 대만 간의 양안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미·중 패권 경쟁에서 우리의 선택은 진퇴양난이다. 안으로는 전대미문의 초초저출산율(0.78)로 한국이 소멸해가고 동학개미 영끌족 청년은 피눈물을 흘리며 빈곤율과 자살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의 노인들은 절망하고 있다. 한때 유행하던 헬조선은 이제 ‘지옥 불반도’가 되어가고 있단다.

난세는 유능한 충신의 출현을 기다리게 마련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한 병법의 달인 이순신 장군은 유능한 충신이었다. 지금 국민은 이 난세를 해결할 정책의 달인, 유능한 충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내로남불의 혼탁한 세상에서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기는 매우 어렵다. 간신일수록 정의와 애국을 부르짖고, 파벌 지어 연대하고, 처세술에 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간신보다 훨씬 더 큰 사회적 폐해를 초래하는 것은 무능한 충신이다.

우파는 경쟁 효율 맹신해 정부정책 개입 반대하다 시장실패 초래
좌파는 복지가 성장 이끈다며 선심성 과잉 복지로 재정 파탄 유도
시장에 의한 ‘내생적 성장’과 정책에 의한 ‘외생적 성장’ 함께 가야

무능한 충신은 국가에 암적 존재

김태유의 퍼스펙티브

김태유의 퍼스펙티브

첫째, 간신은 자기가 하는 일이 잘못된 일인 줄 알기에 숨어서 남몰래 한다. 그런데 무능한 충신은 자기가 하는 일이 올바른 일이라고 착각한 나머지 세상에 드러내놓고 무리 지어 함께한다. 그래서 국가적 폐해는 간신보다 훨씬 크고 광범위하다. 둘째, 과거 농업사회에서는 전 세계 경제성장이 정체되어 있었기에 간신이 부정한 방법으로 사욕을 채운 딱 그만큼 국가 경제가 퇴보했다. 그러나 현재 산업사회에서는 무능한 충신이 관직을 차지하고 세월을 허송하는 동안 세계 각국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그만큼 국가 경제가 퇴보한 셈이 된다. 그런데 간신이 축낸 세금보다는 무능한 충신이 잃어버린 국부(national wealth), 즉 경제성장의 기회비용이 규모 면에서 백배 천배 더 크다.

공자는 나라에 해로운 신하를 육사신(六邪臣)이라 하였다.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구신(具臣), 아첨하는 유신(諛臣), 참소하는 참신(讒臣), 간사한 간신(奸臣), 반역하는 적신(賊臣), 나라를 망치는 망국신(亡國臣)이다. 이것은 성장이 정체된 과거 농업사회의 분류였다. 그러나 경제가 가속적으로 성장하는 현대 산업사회는 다르다. 필자는 이를 처세형·충복형·사대형·수구형·중상모략형 등 5가지 무능한 충신(이하 무충)으로 정의한다.

선·후발국 발전 원리는 서로 달라

첫째, 처세형 무충은 통상 대인관계가 지나치게 원만한 처세의 달인들이다. 때론 훌륭한 인격까지 갖춘 경우도 많다. 이들이 정체된 농업사회에서 태어났으면 충신으로 분류될 수도 있고 또 무능하기 때문에 자리만 차지하는 구신으로 분류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속적으로 발전하는 산업사회에서는 경제성장의 엄청난 기회비용을 상실케 하여 나라를 가장 크게 망치는 대표적인 무충이다.

둘째, 아부형 무충은 아첨하는 유신에 해당하는 자들로서 권력자에게 절대복종하는 충복이거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스트들이다. 이들이 권력자를 추종하느냐 아니면 인기를 좇느냐는 경제 원칙이나 정의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쪽이 더 손쉽게 사사로운 이익을 취할 수 있을지에 따라 아부의 대상을 수시로 바꾸기도 한다.

셋째, 사대형 무충은 강대국 후광을 업고 외세를 추종하는 자들이다. 후진국 시절에는 이들이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난 선각자였다. 그들이 선진문물을 도입함에 있어 국익 차원에서 꼼꼼히 따져보고 선별적으로 수용하면 충신이 된다. 그러나 선진문물을 맹신하고 무조건 따라 하면 무충이 된다. 왜냐하면 선발국의 발전 원리는 후발국의 발전 원리와 다르고 때로는 서로 상충하기 때문이다.

넷째, 수구형 무충은 과거라는 절대 기준으로 미래를 예단하는 시대착오적인 자들이다. 서구 산업혁명의 물결이 밀려오던 서세동점(西勢東漸) 시대에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하던 조선 사대부가 가장 전형적인 수구형 무충이었다. 현재 4차 산업혁명과 동북아의 전향적인 대외정책을 결사반대하는 자들이 구한말 산업혁명과 개국(開國)을 결사반대하여 망국을 자초한 바로 그 무충들의 환생인 셈이다.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미래 지식산업사회에서는 이런 자들이 바로 나라를 망치는 망국신이다.

국가발전 원리 모른 채 국정 운영은 위험

다섯째, 중상모략형 무충은 참소하는 참신에 해당하는 자들로서 경쟁자를 비방, 투서하고 무고하는 자들이다. 충신은 중상모략에 매우 취약하다. 충신은 평소 처세와 아부로 패거리를 만들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변호해줄 세력이 많지 않다. 더 큰 이유는 불특정 다수를 위한 공명정대한 정책들은 그 추진 과정에서 정적들을 양산하기 때문이다. 수차례 무고와 파직을 당하고 삭탈관직에까지 이른 이순신 장군, 미국의 밑그림을 그린 알렉산더 해밀턴 전 재무장관, 근대 독일을 만든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 등 국가 발전에 크게 공헌한 충신들에게 유독 정적이 많았던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어떤 무충이 있는지 살펴보자. 처세아부형 무충은 줄대기와 줄서기의 달인인 출세지상주의자들이다. 사대수구형 무충은 권좌에 있든 재야에 있든 권력과 명예를 탐하는 입신양명의 화신들이다. 중상모략형 무충은 그 어떤 형태의 무충과도 수시로 잘 결합하는 가장 암적인 형태이다. ‘무충’은 ‘무능한 충신’을 줄인 신조어지만 한문으로 무충(無忠)은 ‘충성심이 없다’가 되고, 순우리말 무충은 ‘둔하고 멍청한’을 의미하기 때문에 용어 사용상의 오해나 혼란은 없을 것이다.

정체된 농업사회에서 충신과 간신을 나누는 경계는 윤리적·도덕적 기준이었지만, 가속하는 산업사회에서 충신과 무충은 국가발전 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정책적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따르면 우리가 맛있는 만찬을 즐길 수 있는 것이 빵집, 고깃간, 양조장 주인들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서가 아니라 각자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시장 경쟁 때문이다. 그리고 자유시장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정부가 법·제도는 물론이고 교통·에너지·통신 등의 사회기반시설을 정책적으로 잘 갖추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시장에 의한 내생적 성장’과 ‘국가 정책에 의한 외생적 성장’이다. 이런 국가발전 원리도 제대로 모르면서 관직을 차지하거나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무충이다. 무충은 정치권과 정부는 물론이고 언론계·학계 등 사회지도층 전반에 포진하고 있다.

국민이 무능한 충신 걸러내야

현재 한국 사회는 보수 우파와 진보 좌파로 양분되어 있다. 보수 우파가 자유시장에 의한 성장론자라면, 진보 좌파는 국가 개입에 의한 분배론자인 셈이다. 경쟁의 효율에 의한 내생적 성장만 알고 국가 정책에 의한 외생적 성장을 몰라 시장의 실패를 초래하는 시장 만능주의자가 보수 우파 무충이라면, 복지의 가치만 알고 외생적 성장을 선심성 과잉 복지로 오해하여 재정 파탄을 초래하는 포퓰리스트가 진보 좌파 무충이다.

생산에 있어 보이지 않는 손의 시장 기능을 국가 정책으로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 선진국의 필요조건이라면, 소비에 있어 취약 계층을 위한 지속가능한 최대한의 복지를 실천하는 것이 선진국의 충분조건이다. 앤서니 기든스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제시한 『제3의 길』이 실패한 원인은 모호한 중도 좌파적 노선으로 좌우 양측의 장점이 정치적으로 희석되었기 때문이다. 내생적 성장과 외생적 성장, 그리고 지속 가능한 최대한의 복지는 양측의 장점을 정책적으로 모두 살린 것이기 때문에 국가 발전의 필승 전략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한산도 해전에 앞서 이순신 장군은 무충 원균에게 일갈했다. “공은 병법을 모르오. 그리하면 필히 패할 것이오(公不知兵 如此必敗).” 내우외환 시대를 맞이한 국민이 무충 정치인들을 향해 일갈할 차례다. “귀하는 정책을 제대로 모르오. 그리하면 필히 나라가 망할 것이오.”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 리셋 코리아 운영위원